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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29. 2020

온달

그는 도시의 복판에 사무실을 내고 있었다

검은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책상에서

그는 묘비명을 고민하고 있다


채우고 채우다 결국 다 채우고 가는 이의

안고 안으려다 결국 다 안은 이의

뜨고 또 뜨려다 결국 뜨고 마는 이의


가묘에도 비석을 세우나요

봄햇살에 유랑하는 먼지 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가 답한다

묘를 만드는 건 비석을 세우고 싶어서야


죽음은 두렵고 저생은 날조되었다

저질러야 할 실수가 여전히 많다

파묘의 시기 묘 주인의 이름이 묘연해졌다


흡족해진 그가 반으로 접는 면도칼을 챙긴다

벚꽃색 넥타이를 고쳐 맨 그가 말한다

자 이제 가볼까


말러가 흐르는 차 안에서

그는 한치의 웃음도 내놓지 않는다

기류는 그와 나 안에 고스란히 담긴다


가묘가 늘어서 있다

묘를 쓴 이의 이름들은 감춰져 있다

봉분 밑으로 숨어들기 위해선

너덜너덜해진 이름 따윈 버려야 한다는 듯이


다만 묘비들이 있다

민트, 탠저린, 단청, 타탄체크,

새끼 고양이, 장마구름, 로제 파스타 색의


비석이 없는 묘들을 가리키며 고르라고 하는

남자에게선 직업윤리 이상의 진지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넥타이가 흐트러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묫자리를 정한다

흙색 잠자리가 앉아 있던 곳에


묘비명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묻힌 사람은 어차피 상관없잖아


남자가 면도칼을 꺼내 편다

하늘이 두 배로 펴지면서

공기의 밀도가 반으로 낮아진다


담백할 필요가 없는 침묵이었다

고동칠 필요가 없는 입술이었다

담을 필요가 없는 표정이었다

키울 필요가 없는 걸음이었다


배양접시에 두고 온 그녀들이 잠시 떠올랐지만

묘 안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가벼워진 하늘을 덮고 눕는다

잠자리 떼가 날아와 풍경을 마저 가린다

묘비명을 소리 내 읊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낮을 채운 온달이 잠시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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