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Jan 05. 2021

단문의 계획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그맣고 닿을 수 있고 가깝다

(...)

수많은 무덤들 느닷없는 폐허들은

도면 속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시 '지도' 中,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 「충분하다」





단문의 계획을 적는다.


나와 내 주위는 늘 같아 보이지만 여하튼 새해니까.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도 슬쩍 용인할 수 있고,

지저분한 불화의 장면이나 이유 없이 무기력한 기분도 가뿐히 외면할 수 있는 시점이니까.


몇 줄이 금세 찬다.  


OOO는 오늘 바로 시작한다

OOO는 이제 하지 않는다

OOO는 알아보고 더 할지 말지 판단한다

OOO의 1단계는 3월 안으로 시도한다

OOO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 후 상황을 본다


문장을 채 이루지 못하고 단어 한 두 개로 적힌 계획도 있다.


OOO의 OOO

OOO와 OOO

OOO 또는 OOO

OOO 다음에 OOO



지도 위의 기호들처럼,

모든 계획은 ' 조그맣고 닿을 수 있고 가깝게' 적혀야 한다.


계획의 총합은 한 페이지를 넘어서는 안 된다.

한눈에 들어와야 눈에 각인이 된다.

과한 욕심을 낸 건 몇 개 들어낸다.


이 계획의 이행률은 얼마나 될까, 생각한다.

계획들의 발목을 잡는 건, 늘 나 자신이었다.

뭔가를 안 했던 과거와 못 하는 현재를 동시에 가진 나는,

예전엔 흐지부지된 계획이 과연 될까 하는 의심부터 만들어낸다.

마치 유체 이탈한 내가 남아 있는 나 자신을 미심쩍게 바라보듯이.



그럼에도 위아래 좌우 이리저리 조정해, 한 장의 계획을 완성한다.


간결하게 적힌 계획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충분히 해내지 않아도 뭐 어떤가 싶다.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한 발 멈칫 내밀다 말더라도 내민 발보다 떼지 못한 발이 부끄러울 테니까.

엉뚱한 방향으로 갔거나, 아예 시도조차 못한 건 슬쩍 내년 계획에 찔러 넣으면 되니까.


올 한 해도 시시때때로 게을러지고 될 대로 돼라 식으로 살게 되겠지만,

짱짱한 계획표 한 장 품고 있으면, 잊을만할 때 한 번씩 읽으면,

산만하지 않은 날 며칠쯤 더 생기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아저씨들은 꽤 근사했었음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