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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역할
Jan 05. 2021
단문의 계획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그맣고 닿을 수 있고 가깝다
(...)
수많은 무덤들 느닷없는 폐허들은
도면 속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시 '지도' 中,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 「충분하다」
단문의 계획을 적는다.
나와 내 주위는 늘 같아 보이지만 여하튼 새해니까.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도 슬쩍 용인할 수 있고,
지저분한 불화의 장면이나 이유 없이 무기력한 기분도 가뿐히 외면할 수 있는 시점이니까.
몇 줄이 금세 찬다.
OOO는 오늘 바로 시작한다
OOO는 이제 하지 않는다
OOO는 알아보고 더 할지 말지 판단한다
OOO의 1단계는 3월 안으로 시도한다
OOO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 후 상황을 본다
문장을 채 이루지 못하고 단어 한 두 개로 적힌 계획도 있다.
OOO의 OOO
OOO와 OOO
OOO 또는 OOO
OOO 다음에 OOO
지도 위의 기호들처럼,
모든 계획은 ' 조그맣고 닿을 수 있고 가깝게' 적혀야 한다.
계획의 총합은 한 페이지를 넘어서는 안 된다.
한눈에 들어와야 눈에 각인이 된다.
과한 욕심을 낸 건 몇 개 들어낸다.
이 계획의 이행률은 얼마나 될까, 생각한다.
계획들의 발목을 잡는 건, 늘 나 자신이었다.
뭔가를 안 했던 과거와 못 하는 현재를 동시에 가진 나는,
예전엔 흐지부지된 계획이 과연 될까 하는 의심부터 만들어낸다.
마치 유체 이탈한 내가 남아 있는 나 자신을 미심쩍게 바라보듯이.
그럼에도 위아래 좌우 이리저리 조정해, 한 장의 계획을 완성한다.
간결하게 적힌 계획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충분히 해내지 않아도 뭐 어떤가 싶다.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한 발 멈칫 내밀다 말더라도 내민 발보다 떼지 못한 발이 부끄러울 테니까.
엉뚱한 방향으로 갔거나, 아예 시도조차 못한 건 슬쩍 내년 계획에 찔러 넣으면 되니까.
올 한 해도 시시때때로 게을러지고 될 대로 돼라 식으로 살게 되겠지만,
짱짱한 계획표 한 장 품고 있으면, 잊을만할 때 한 번씩 읽으면,
산만하지 않은 날 며칠쯤 더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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