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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10. 2021

우리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싶어 한다

감정 프로그램은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체계다. 

선천적인 감정적 행동에다 살아가면서 획득하는 새로운 감정적 행동들이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추가되는 것이다. 감정 프로그램의 이 특징 덕분에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다. 


-「얼굴의 심리학」 중, 폴 에크먼





며칠 전 당근마켓에서 소형 자외선 살균기와 손소독제를 샀다. 


편의점에서 택배를 받아 드는 순간 웃음이 났다.

테이프로 꼼꼼하게 싼 포장은 이번에도 여지없었기 때문에. 


몇 번 개인 간 거래를 하면서 택배를 받아본 결과,  

업체에서 온 택배와는 확연히 다르다.

모든 모서리와 이음새를 철저하게 막은 포장인 데다가, 

열어보면 물건 하나하나 정성 들여 비닐이나 완충제로 쌓여 있다.  

뭐랄까, '내 친구 거니까 문제 생기면 안 돼요!' 같은 귀여운 경고가 잔뜩 붙어 있는 느낌이랄까. 


시간과 정성을 들인 이런 택배를 받으면, 그래서 기분이 좋다. 



상자를 열어보니, 여지없이 보낸 사람의 수고가 잔뜩이다. 

휴대용 손소독제는 하나하나 포장돼 있고, 살균기 박스도 여러 겹으로 쌓여 있다. 

그리고 "감사해요"라는 손글씨가 적힌 비닐봉지가 하나 있었다. 


열어보니 휴대용 미니 비누, 세정제, 커피믹스와 과일차, 

그리고 핸드크림이 우르르 쏟아진다. 


와. 

채팅으로 구매 대화를 나눌 때부터 친절했던 분이었는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는 나한테 이것저것 챙겨준 것이다. 

공처럼 굴려도 안전할 거 같은 겉포장에 좋아졌던 기분에

이 앙증맞은 사은품(?)들을 보고 한층 더 좋아졌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싶어 한다. 

확실하다. 



나의 호의에 대한 반응이 불확실한 상황, 

그러니까 예를 들어 상대방이 어떻게 대꾸할지 짐작이 안 된다거나, 

혹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나더러 '오버'한다고 말할 것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끊임없이 작은 친절을 베풀고 싶어 한다. 


낯선 사람에게도 웬만하면 웃어주고 싶고, 

친하거나 각별한 사이가 아니라도 뭔가를 주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친절은, 

별다른 이유 없이 꽤 전방위적이랄까.    



왜 그럴까 생각해본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자기애라고 할 수도 있다.  

스스로 '난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안심하고 싶어서라고.   


하지만, 친절한 자신의 모습이 좋아서 

일부러 노력한다는 이런 설명은 뭔가 부족하다. 

우리가 뭔가를 계산한 후에 친절을 베푼다는 얘기인데, 

그러기엔 우리의 친절은 뜬금없거나 즉흥적인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의 친절은 그저 '타고난 반가움'이 아닐까?  


택배 속 작은 물건들은, 나의 물건을 이어받는

(그러니까 일종의 확인된 공동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 보내는 반가움이자

내가 불현듯 맺게 된 소소한 관계에 대한 반가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선천적인 반가움에 더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내보인 반가움이 더 큰 반가움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는 걸 경험한다.  

그렇게 우리 안에 호의가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추가되고'

그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 


얼굴을 본 적도 없지만 나와 같이 살아가는 누군가를 반기는 것.

이런 것들 때문에 이 커다란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것이다. 

작은 선물들을 집구석구석에 정리하면서 다시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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