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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Dec 23. 2021

처음의 연속

#이사 온 집에 적응하기

거주지에 대해 얘기하는 건 남사스럽다. 

얼마 전까지 살던 낡은 집에 관해서라면 그곳에서 지낸 시간을 핑계 삼아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어느 집에 살고 어느 지역에 머문다는 건 그 자체로 별다른 매력이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거주에 대해선 조금 다르다. 

살고 있는 공간에 애착이 있건 없건, 그곳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하건 아니건, 

내가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처럼 재미없는 인간에게, 

스스로의 주거는 꽤 유용한 눈요깃거리이기도 하다. 



이사 온 첫 주말에 올라온 엄마와 대화를 하다가, 

꽃무늬 접시에 이야기가 미쳤다. 


저 코렐 접시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있었다.   

고향집에 있던 접시를 형이 자취한다고 들고 올라왔고, 

형이 결혼하면서 자취방의 물건들을 이어받은 내가 아직 쓰고 있다. 


엄마의 회상은 '그게 76년도인가, 77년도인가?'로 시작했다. 

갓 결혼해서 홍성에 살았던 부모님이 광천의 미군부대 앞에 가서 사 왔다고 했다. 

당시로는 매우 비싼 돈을 준 엄마의 첫 접시 세트였고  

이 꽃 모양 말고 다른 꽃 모양도 있었는데 이걸 선택했다고 했다. 


76년이면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내가 가지고 있는 찻잔 세트 외에도 고향집에서 큰 접시 등등 여러 가지가 아직 남아있으니, 

그 돈 값어치는 충분히 한 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접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76년 갓 결혼했었을 시절의 설렘이 생생하게 느껴진 게, 이 접시의 가장 큰 가치이지 싶었다. 


그렇다, 처음은 늘.

 


이사를 오고 혼자 이것저것 정리하면서, '이 집에서의 처음'이 이어진다. 


이 집에서의 첫 샤워,  

이 주소로 온 첫 택배, 

첫 세탁과 첫 산책, 

처음 간 동네 치킨집과 마라탕 집,


그리고 굳이 거실 한가운데 이불을 깔고 누워서 본 첫 천장 풍경까지. 



새로 이 집에 들인 것들도 많다. 

밥솥, 책장, 스탠드, 에어컨, 세탁기, 건조기, 이불, 수건......


전에 살던 집에서 많이 버리고 와서 일 수도 있지만

사람이 혼자 사는 데에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했던가 싶을 정도로,

나 자신의 필요를 과장하고, 그 필요를 만족시키려고 무언가를 주문했다. 


새로 온 것들은 자신의 첫 소용을 다하는 중이고, 

그렇게 이사 오기 전 비어있던 집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천성적으로 낯선 것들을 불편해한다.

낯 모르는 이에게 전화하는 건 오래 고민해야 가능하고, 

처음 운전해서 가는 동네에서는 긴장해서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을 만날 때도 쉽게 격의 없어지지 못하고,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익숙해진다. 


이런 성격에 처음이 연속되는 건, 더 정확히는 '처음만' 연속되는 건

꽤 신경 쓰이는 일이고, 그것들을 계속해 나가는 건 나로서는 꽤 무리하는 일이다. 



2주 동안 쉬지 않고 이 집에서의 '처음'들을 처리하다가,  

조금 서둘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리는 이사 후에 살면서 끝없이 하는 거고, 

다 정리됐다 싶으면 그때는 이사를 가야 할 때일 수 있는데, 

난 2주 안에 모든 걸 '해결'했다. 


기분과 행동이 붕 떠있는 유동적인 상황이라 평소와 다르게 결정이 쉬워서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새로 온 집이 낯설어서 빨리 내 물건과 경험들을 채워 넣고 싶은 욕구가 커서였다. 



집의 빈 공간들을 빠르게 정리하면서 이 집과 친해지려 하는 이유는, 

익숙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동네를 내가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으로 바꾸고 싶고, 

눈에 익은 구석 하나 없는 집을 어떻게든 내 기분과 생각을 덜어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서겠다. 


아마 느긋하게 집 정리를 미룬다면, 

그 기간만큼 이 집과 나의 서먹서먹함이 더 길게 가지 않을까.


신경이 쓰이고 무리를 하더라도, 

조금 서두르는 감이 있어서 스스로 민망하더라도, 

눈에 뜨이는 족족 이 집에서의 처음들을 해결하다 보면, 

붕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새 집에서의 시간이 점점 바닥으로 내려오지 않을까 싶다. 



늦은 밤, 이 집에서의 첫 김치찌개를 끓인다.

옛 집에서의 찌개와 같은 맛이어서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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