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옛다 눈!

여유 있는 삶이란?

by 까까멜리아

“엄마, 눈은 언제 와?”


겨울이 오니 아이들이 매일같이 눈은 언제 오나 기다린다. 그러나 11월 하순까지 20도를 웃도는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다 보니,


‘올 겨울은 눈 보기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웬걸…

첫눈으로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하도 눈, 눈 거리니 하늘에서 ‘옛다, 눈!’ 하고 쏟아 부어준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사는 지역은 기록적으로 많은 눈이 내린 곳이었다. 퇴근한 남편이 밤늦게 나가 한 차례 쓸어내고 잤는데, 다음날 아침이 되자 거의 무릎까지 눈이 쌓여있었다. 첫째 학교는 급히 휴교령을 내렸고, 둘째 아이도 등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모두 집에 머물렀으나 남편은 그 눈길을 뚫고 출근했다.(가장의 무게란 이런 것인가 싶으면서도, 혹시 우리 모두 집에 있어 굳이 출근한 건가 싶기도…) 아이들과 오랜만에 집에서 머무는 건 어렵진 않았으나, 남편이 출근했기에 우리 집 앞 눈은 내가 치워야 하는 과제가 생겼다.


나는 작은 타운하우스에 거주하고 있는데, 내 집 앞 눈은 내가 치워야 한다. 두툼한 잠바와 장갑, 모자 장착 하고, 고무장화 챙겨 신고 초록빛 큰 플라스틱 삽과 실리콘 빗자루를 들고 비장하게 대문 밖으로 나섰다. 우리 차 위로 40센티 넘게 눈이 쌓여있었다.

재난영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삿포로 여행 안 가도 되겠다.’


’일단 차 위에 있는 눈을 치우고, 바닥을 치우자.‘


조심조심 차 위에 있는 눈을 먼저 끌어내렸다. 이번에 온 눈은 묵직한 습설이라 털어지지 않아 끌어내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 와중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모두 다 끌어내리지 못하고 손이 닿는 부분만 대충 눈을 치운 뒤, 본격적으로 길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눈이 무거워서 조금씩 여러 번 삽질을 하며 눈을 치우는데, 우리 집 담장에 최대한 붙이고, 길 건너 담장에 최대한 붙여봤으나 더 이상 눈을 쌓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계속 눈이 내리니 어차피 몇 시간 뒤에 또 치워야 되겠다 싶어 주차된 차 들 사이에 최대한 쌓아 두고 일단락했다. 정말 잠깐 한 것 같은데 한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이 나며 모자를 벗으니 추운 날씨에 머리에서 김이 폴폴 났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대’ 자로 누웠다.


‘홈 스윗 홈이다 진짜.’


그대로 누워 잠시 자고 싶었으나, 아이들은 마당에 나가 눈 놀이를 하고 싶다고 했다. 도저히 바로 움직일 힘이 없어서,


‘엄마는 노동을 하고 와서 힘드니 잠시 충전을 하고 가자.’


하고 그대로 15분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뒤 아이들과 나가서 놀았다. 습설은 무겁고 잘 뭉쳐져서 아이들이 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다 먹은 된장통을 분리수거함에서 꺼내 하나씩 벽돌을 찍어냈다. 물론, 내가!

처음에는 ‘이글루’라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으나 결과물은 ‘벽돌집 포토존’ 정도로 마무리됐다.


다이소에서 한 개 2천 원에 사 둔 썰매 두 개와, 마당에 한가득 쌓인 눈, 이 두 가지만으로도 아이들은 신나게 잘 놀았다. 눈을 모아 미끄럼틀을 만들어 타고 놀기도 하고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 보니 한 시간 훌쩍 지났고, 혹시 감기라도 들까 싶어 서둘러 들어왔다.


몸이 노곤하니 뭐라도 시켜 먹고 싶었지만 학교도 휴교한 날씨에 배달이 올 리 만무했다. 게다가 우리 집은 상가에서 거리가 꽤 된다. 그렇다면 오늘 점심은… ‘짜치계’다. 라면이 몸에 좋지 않아도 다 음식인데 라면으로 끼니를 주기에는 뭔지 모를 죄책감이 들어 그동안 주지 않았던 메뉴였다. 그래도 이런 날은 라면이지! 하고 짜파게티 두 개를 끓이고, 계란프라이도 넉넉히 4개 했다. 잘 익은 짜파게티를 그릇 세 개에 나눠 담고, 그 위에 취향 따라 계란프라이, 체다치즈, 고춧가루를 올린 후 맛있게 먹었다.


새벽배송과 배달이 일상화된 내게, 눈이 많이 온 날의 고립된 하루는 건빵 속에 별사탕과 같았다.

예상치 못했지만 의외로, 생각보다 괜찮았다.


정말 오랜만이지만 낯설지는 않은, 여유롭고 포근한 느낌이 드는 하루였다. 의도치 않게 예정된 모든 것들이 취소되고 나니 몸을 움직이고, 온전히 아이들과 복작이고, 집에 있는 것 들로만 간단한 끼니를 차려먹는 하루가 선물같이 느껴졌다.


미니멀라이프 하고 싶다며 쉴 틈 없이 여러 책을 찾아 읽고, 집을 비워야 한다고 버릴 것을 찾고 얼마 못 가 그걸 또 구매해 채우고, 말로는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해야 할 일, 챙겨야 할 일들을 끊임없이 체크하던 내 일상에 찾아온 이벤트였다.


이 날을 기점으로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아주 아주 아주 조금은 바뀐 것 같다. 가끔은 쉬는 시간에 무언가를 읽지 않아도 되고, 끼니를 간단히 라면으로 때워도 되며, 그냥 아무 계획 없이 놀아도 된다는 것, 상투적인 말이지만, 여유 있는 삶은 정말 내 맘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날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네’ 자리가 귀찮아서 ‘일곱’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