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강형철 감독(2011) / 대한민국

by 정작가

써니텐처럼 상큼한 그녀들이 온다. 태양처럼 빛나는 화사한 웃음은 햇살처럼 부서진다. 서로 바라만 보아도 웃음이 나오는 여고시절. <써니>는 우리가 한 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을 되새겨보게 한다. 트위터,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가상공간의 세계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부딪히는 현실의 세계를 갈망하는 요즘 세태에 청량제처럼 맑은 기운으로 기성세대의 눈을 스크린에 고정시키게 한다.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교육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써니>에서 등장하는 칠공주는 그런 의미에서 이단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요즘의 일진회와는 전혀 격이 다르다. 물론 표면적으로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지만 나름 순수한 마음이 엿보이기도 한다. 폭력에 맞서는 폭력을 단순히 추억으로만 회상할 것인가하는 문제의 제기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집단의 힘은 개인의 존재감을 사라지게 한다.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은 강하다.


영화속의 배경이 된 군부독재 시절의 정치권력 또한 이런 집단적인 메카니즘을 따른다. 소수의 반항하는 시민집단은 체계화된 집단 앞에 처절하게 무너진다. 개개인의 성향은 다르지만 뭉치게 되면 개개인의 색깔은 사라지고, 제2의 색깔이 나타난다. 소속 구성원들이 그것을 부정하려해도 집단의 힘앞에 개인의 성향 따위는 무시 당할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역설에도 개인의 힘은 약하기 때문에 집단을 추종하고, 그 속에서 소속의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속의 개인은 강하다. 집단의 비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영화에서도 한 사람의 고통은 집단의 고통으로 전이된다. 표면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우정이 될 수도 있고, 의리일 수도 있다. 집단은 결국 해체되기 마련이다.


이들이 여고동창생으로 공유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세월이 흐른 뒤에 재회를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모임인 '써니'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저 추억의 한 장면일 뿐. 그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주어진 운명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어느 집단에서나 주축 세력은 존재한다. 동호회나 직장, 정당,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런 집단속에서 주축이 될 수 있는 것은 관계의 힘이다. 얼마나 효율적이냐, 체계적이냐에 따라 힘의 강도는 커질 수 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이런 주축세력들은 집단 구성원을 모두 포용할 수 없다. 수적으로 그들은 항상 소수이다. 소수의 특권세력이 결국 다수로 구성된 집단을 이끌어 간다. 정치체제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영화<써니>는 이런 집단의 힘속에서 군림하는 소수의 힘을 보여줌으로서 시대의 아픔속에서 저항하지 못했던, 다수의 국민들이 느꼈던 무력감을 추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금 재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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