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벼락치기는 DNA다(11주 차)

영어 프레젠테이션

by 라즈베리

이번 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너무 바빠서 힘들다는 감각조차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필수로 들어야 하는 IT 영어 수업, 그 마지막 관문이었던 15분 프레젠테이션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이걸 통과해야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무조건 해내야 했다.


사실 이 학기에 IT 영어 수업만 들으려고 했지만, 혹시라도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데이터베이스와 자바 프로그래밍도 함께 듣고 있었다. IT 영어 수업은 교수님에 따라 스타일이 크게 달라지는데, 다행히 우리 교수님은 꽤나 여유로운 편이었다. 한 주는 토론으로, 한 주는 의미 없는 잡담으로 채워지는 수업. 어떤 날은 3시간짜리 수업을 50분 만에 끝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시간도 1월이 되자 급격히 무너졌다. 15분 프레젠테이션 과제가 우리 앞에 닥친 것이다.


주제는 IT와 관련된 모든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식이 깊어야 하는 주제보다는, 내가 관심 있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곧 두 살이 되는 아이의 엄마. 자연스럽게 '전 세계 IT 교육'이라는 주제가 떠올랐다. 바로 챗GPT를 켰다.


“전 세계 IT 교육에 대해 발표하고 싶은데, 어떤 내용이 좋을까?”


챗GPT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주제의 틀이 잡혔다. 이어서 자료를 요청하고, 최근 어린이들의 집중력 저하 문제와 IT 교육의 연관성, 고전문학과 예술 교육의 필요성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점점 괜찮은 프레젠테이션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 나는 이걸 어떻게 외울 것인가?



금요일, 도서관에 앉아 대략적인 스크립트를 쓰고 PPT를 만들었다.

토요일 밤에는 스크립트를 더 자연스럽게 수정하고, 일요일에는 겨우 첫 장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슬라이드 두장을 더 외울 수 있었다.

월요일, 어제 외운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 앉아 겨우 3장을 외웠다.

화요일에는 어제 외운 것들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3장을 더 외웠다. PPT도 좀 더 보기 좋게 수정했다. 하지만 수요일이 되자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지금까지 외운 6장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내고 한 주 미루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이 고통을 한 주 더 연장하는 것은 끔찍했다.

결국, 수요일 오후까지 나머지 슬라이드를 모두 외웠다. 한 장 한 장은 말할 수 있었지만, 전체 내용을 이어서 말하려니 막막했다.

목요일. 드디어 발표 당일. 오전까지도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도서관 구석에 앉아 끝까지 연습했다. 25분이 나왔다. 너무 길다. 몇 부분을 삭제하고 다시 연습하니 20분. 그래도 막히는 부분은 계속 막혔다. 마지막으로 집중해서 그 부분만 연습하고, 점심을 먹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다. 해내야 한다.




수업에 들어가자 교수님이 물었다.


“누가 먼저 발표할래?”


한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그는 대본을 보며 줄줄 읽기 시작했고, 교수님과 학생들의 날카로운 질문에는 “모르겠다”라는 대답만 했다. 그래, 최소한 이 학생보다는 나을 수 있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두 번째 순서의 발표 기회를 잡으려 했지만 닉이 가로챘다. “제 발표가 앞 발표와 연결되어 있어서 이어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쳇, 닉. 네가 그럴 줄 알았다. 평소에도 말은 닉답게 발표도 30분 가까이 끌었다. 결국 교수님이 “닉,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라고 경고했다. 닉은 당황했고, 실수를 연발했다. 닉이 이렇게 무너지는데 나는 어쩌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 사이 다음 발표 순서를 또 다른 학생이 가져갔다. 그는 블록체인에 대해 발표했지만, 영어가 미숙해 대본을 보고 읽었다. 교수님은 결국 “너무 시간이 길어지니, 지금 하는 부분부터 점프해서 슬라이드 맨 뒤로 가줄래?”라고 말했다. 다들 15분보다 훨씬 길게 발표를 준비해 와서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제는 용기를 내야 할 때다.


“다음 발표할 사람?”


드르륵— 내가 의자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노트북을 연결해서 빔프로젝터에 화면을 띄우고 있는데 마침 학생들이 교수님께 쉬는 시간을 요청했다. 1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화장실로 달려가면서도 속으로 스크립트를 되뇌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못 먹어도 고(Go)다.’ (이 표현이 맞으려나?)


“Good evening, everyone.”

입에서 말이 나오는데, 내 머리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미치겠다.’ 교수님의 눈,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첫 장은 무난했다. 그러나 늘 막히던 부분에서 결국 막혔다.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스크립트를 잠시 봤다. 아, 안 돼! 집중해야 한다! 억지로 입을 떼어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이후에는 술술 말이 나왔다. 다음 말이 생각이 나지 않는 몇 부분은 과감히 스킵했다.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 같았다. ‘설마 15분이 안 됐으면 어쩌지?’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핸드폰의 타이머를 확인했다. 18분. 다행이다.

“질문 있나요?”

질문이 들렸지만, 긴장이 풀리니 정신이 몽롱했다. 여러 질문에 대답을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질의응답이 끝나자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닉이 두 손을 들어 엄지 척을 해줬다. 으이그, 얄밉지만 미워할 수가 없네. 다른 학생은 문밖으로 나가며 오늘 발표 좋았다고 말해줬다. 기분이 넘 좋았다. 가이드 라인을 지키기 위해 스크립트를 보지 않고 모든 것을 외워서 발표하려고 한 노력을 알아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오늘 총 7명이 발표를 하기로 했으나 5명밖에 발표를 하지 못했고 나머지 2명은 발표순서가 다음주로 연기 되었다. 휴 오늘 다 끝내서 다행이다.


발표를 마친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후 교실에 남아 일대일로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았다. 교수님은 주제도 좋았고, 발표 내용도 훌륭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다만 복수형 단어에서 s를 잘못 붙이는 실수만 주의하라고 했다. 그리고 점수는 2점. 독일식 평가 기준에서 최고 점수 다음으로 좋은 점수. 대만족이었다. 칭찬에 후한 미국 선생님 덕분에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 덕분에 밤늦은 시각 버스가 안오고 에스반이 늦어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10시가 넘은 시각 집에 도착해서 맥주를 땄다. 치익! 온몸으로 퍼지는 맥주의 쌉쌀함이 너무도 달았다. 내일 아침 10시 수업이 있지만 나는 오늘 프레젠테이션이 잘 끝난 자축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넷플릭스와 과자 봉지를 오픈했다. 마흔이 넘어도 벼락치기를 하는 내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지만 이런 생각은 뒤로 미뤄두고 오늘 밤은 먹고 놀자!


brunch.jpg 나의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중 한 컷


이전 10화자바로 밤새우고, 영어로 머리 싸매고 (10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