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이유와 결과에 대한 의문

by 아직 간호사

요 며칠 이란 공습으로 인한 여파가 온 국가를 흔들었다. 주식시장이 파랗게 질렸고 동네 주유소부터 기름값이 오르는 등 모든 개인의 시선은 경제와 자본에 쏠렸다. 그러는 사이 묵묵히 사법 3법 개정안은 본회의를 통과했다. 영향 측면에서는 에너지 문제처럼 모두의 피부에 금방 와닿지 않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좋은 영향을 기대하기 힘들고, 시기상 비교적 조용하게 넘어가는 듯해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합리성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후 인류는 명분과 구실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단순한 땅따먹기식 정복에서 점차 이 구역을 수호해야한다던가, 피 혹은 우애로 맺어진 이들의 복수라는 식으로 정당성을 만들었는데 이런 방식은 윤리적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속내를 숨기기 용이했기에 하나의 전략처럼 발전해왔고 순수한 의도가 맞는지 그를 빙자한 속내가 따로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럴싸한 이유는 행동에 무조건 선행하는 규칙이 됐다. 돌연 핵을 이유로 공습한 트럼프의 행보가 예측범위 내에 없는 것 또한 납득 가능한 명분을 제시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을 벗어난 파격이자 일종의 퇴보이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그 전략은 더 화려하게 꽃피운다. 선출된 의원이 입법으로 방향타를 잡고 행정부가 국가를 운영하지만 몇 년마다 민주주의의 주인인 시민에게 평가받기에 그들의 행보는 언제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들이 붙는다. 슬프게도 시민과 의원 모두 완전하지 못해서 전략들은 꽤 잘 먹히는 편이고 뒤늦게 드러난 사적유용, 세력과 결탁한 부정은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곤 한다. 어쩌면 정치에서 명분은 전략이라기보다 목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외쳐온 개혁 역시 예외가 아니다. 비상식적 계엄이 낳은 이번 정부 역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첫 발걸음은 쇄신이었다. 고쳐야 할 대상은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았다. 부처를 더하거나 뺄 때, 종교집단의 해산에 대해 말할 때나 배임이나 자사주 소각 같은 경제, 경영에 대해 말할 때도 개혁이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았다. 전임자의 과오가 분명했기에, 이른바 싸지른 똥을 치운다는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개혁은 대개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명분은 분명했지만 점차 개연성이 옅어졌고 검찰 해체에 대해 이야기할때는 수 해 전 적폐청산과 겹쳐보이기도 했다. 취지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변이 이어지지 못했다. 애초에 정책이라는게 무결할 수가 없으므로 제기되는 우려들을 감안해 다시 수정하거나 부작용을 걷어낼 후속 대응을 마련하는게 통상이지만 우려에 대한 호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노란봉투법에서의 노조 단일화 해석 문제나 상법개정안 통과 이후의 배임죄 문제가 대표적이다. 거기에 의석수가 주는 강제력이 더해지며 숙고나 타협은 낯선 이야기가 됐다. 우려들은 10년 뒤에나 나타날 어떤 잠재적 위험 정도가 아니라 올 해, 빠르면 분기 안에 벌어질 눈앞의 위기임에도 일단 통과만 시키면 개혁이 완수됐다고 여기는 듯하다.(노란봉투법은 내일부터 시행되지만 여전히 가이드라인은 명확하지 못하고 해석은 분분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내부적으로도 회의감이 번졌고 결국 본회의 의결 직전에 여기저기를 땜질한 누더기 법안까지 발생했다. 목적 지향적이라기보다는 결과 지향적인 모습으로 변질되면서 입법과 정책의 취지도 그럴싸하다고 느끼기 어려워진 셈이다.


한 가수가 표절에 대해 마음 속 양심의 문제라서 의도를 증명하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비단 표절 뿐 아니라 속내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짐작과 믿음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사법 3법 개정에 대해 부작용이 연일 거론되는것과 반대로 현재보다 뚜렷하게 나아질거라는 전망은 많지 않다. 부작용을 걱정하는 일은 개혁을 가로막는 불경한 일처럼 되어버렸고 숱한 우려에도 추인은 신속했다. 항간의 이야기처럼 대통령 본인의 사법 리스크를 벗겠다는 자기방어인지 사법 체계의 문제점을 개선하겠다는 절실한 의지인지는 확실치 않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평범한 국민이라면 판사와 검사의 판단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놓일 가능성도, 피고든 원고든 본인의 사건이 상고를 통해 대법원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그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판단을 받을 가능성도 매우 적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수의 국민을 위한 개정이 아니라는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개혁이라는 단어는 중립적이다. 무언가를 고친다, 바꾼다의 의미만 지닐 뿐 결과물이 나아질거라는 보장은 없다. 고쳐야만 하는 이유가 빠져있다면 고치는게 언제나 능사는 아니다. 저의를 밝힐 수 없다면, 적어도 결과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나.

작가의 이전글대형마트와 전통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