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초 편지 (2)
필로테아 님,
그대가 병원에 다녀오신 날도 어느새 날짜로는 어제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진단이 내려질지, 혹은 이미 내려졌는지 모르겠으나 부디 나의 소망대로 의사가 그대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도 일전에 내게 말했듯이,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든 아픈 곳이 하나 이상 생기는 모양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십자가라 하고 불가에서는 업의 결과라 합니다만, 나는 아픔과 그 결과인 상처가 숙명적 굴레나 벌 같은 게 아닌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나무가 어릴 때는 껍질이 여리지만 나이들어 갈수록 비바람을 맞고 흙먼지에 쓸리면서 더욱 단단한 껍질을 갖게 되듯이, 사람도 아픔을 통해 속이 알차게 영글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인생에 아픔이 닥치면 그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이왕 아파야 한다면 제 상처로부터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의 솜씨를 배우는 것도 괜찮은 일로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조개보다 사람의 처지가 좀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조개는 혼자 사는 동물이기에 아파도 혼자 끙끙 앓으면서 진주를 만들어야 하지만 사람은 아플 때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 상처를 이겨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아픔과 그것의 소위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조개 이상으로 발달한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지금까지 적잖은 사람들이 그것을 추구하면서도 결국 그 목표에 닿을 수 없음을 한탄해 왔더랍니다. 영생불사를 시켜준다는 사이비 종교들에 놀아나 인생을 망치는 몇몇 현대인들은 그 극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지요.
옛날 아스테카의 시인 '테페치판의 콰콰우친(Kwakwawtsin de Tepechpan)'도 아픔의 불가피성을 씁쓸하게 노래하였습니다. "결단코 죽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내가 옥이었더라도, 금이었더라도, 도가니에서 녹아내릴 것이고 구멍이 뚫릴 텐데."
그러나 시인도 암시했듯이, 아픔이 꼭 나쁜 일이기만 할까요? 옥은 다듬어야만 아름다운 목걸이가 될 수 있고 금은 녹여야만 가치를 갖는 여러 가지 물건으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옥과 금 같은 무생물이 아니라 다양성을 가진 생물이기 때문에 아픔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균질하지 않습니다만, 분명 아픔을 통해 전보다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는 사람은 존재하고 나는 그대와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필로테아 님, 그대는 어릴 적에 큰 상처를 받은 일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공적인 자리에서와 같이 나에게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만, 어릴 적에 받은 상처가 만든 건 그대 자신의 인격이 아니라 그대가 그 인격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조개의 상처가 그 조개 자체를 규정한다기보다 그것이 만드는 진주의 모양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하듯이, 사람이 가진 상처라는 진주도 남들 앞에 드러내야만 진정으로 반짝일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상처에 대해 말하기만 하는 것도 치유의 과정이므로 좋은 방법이지만, 내가 가진 상처를 통해 남들이 같은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도록 활동하는 것은 어떨까요? 예를 들면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나 지원 단체와 연대하여 공개적으로 발언을 하고 글을 쓰는 일처럼 말입니다. 그대에게 꼭 이렇게 하라고 권하는 건 아니지만, 그대가 가진 진주를 아끼는 마음으로 몇 마디 적어 보았습니다.
그대가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단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더욱 이런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필로테아 님, 말하기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정보화 시대인 지금의 특성상 아이들이 언젠가는 그대의 상처에 대해 알게 될 것으로 나는 감히 예측합니다. 지금은 정보의 확산 속도가 워낙 빠르니 어쩌면 이미 그 상황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대의 상처는 부끄러운 것이 결코 아니지만, 아이들이 그들이 가져야 마땅한 자긍심을 가지도록 돕기 위해서는 그대가 스스로 가진 진주의 빛을 세상을 향해 소위 '뿜뿜하는' 모습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세상에 외치고 싶어, 당신이 누구인지" 하는 천주교 성가의 구절처럼, 그대가 나와 같은 타인에게 그러하듯 자식들 앞에서도 자랑스런 기쁨의 원천으로 빛나길 나는 항상 바라고 있습니다.
필로테아 님, 아마도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면, 타인을 대면할 때 늘 긴장하고 수줍어 있는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데 대해 놀라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실은 예의바른 가면 아래에 사람에 대한 불안을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런 행동 또한 오래된 상처의 결과입니다. 내가 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거부당하는 경험을 많이 해 봤기 때문에, 차라리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난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이렇게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 또한 나의 진주를 빛내기 위한 나만의 방법입니다. 스스로를 해부하는 고통으로써 내 속을 꺼내놓지 않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이상한 오해들을 쌓아 간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타인과 대면한 자리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생각들을 공개된 플랫폼에서 글로 적어내는 것입니다. 그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읽으며 내 글을 통해 조금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일기장이 아니라 공개된 곳에 적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느껴집니다.
나의 상처가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에 최적화된 플랫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지켜주는 진주가 될 수 있도록 나도 나만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인데 이 글에서 이런 나의 시도가 잘 표현되었나 모르겠습니다. 부디 나의 신께서 그대의 마음을 열어주시길, 그리하여 이 부족한 글이 그대의 심장에서 노래하게 되길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은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글로 풀었습니다. 나는 차라리 내가 부끄러움이 좀 없어서, 그대와 함께 카페모카를 잘 만드는 카페에 가서 음료를 앞에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말은 휘발성이 있어서 입에서 나오는 순간 흩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대가 원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글이란 수단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듯 합니다.
두 번째 편지를 맺으며 어떤 말로 그대에게 축복을 빌어 줄까 하다가, 뜬금없이 클로버가 생각납니다. 내가 어릴 적, 대략 2천년대 초반에는 네잎클로버 찾기가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그때 내가 가까이 지내던 한 친구는 세 잎을 가진 평범한 클로버보다 네잎클로버가 나음을 설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클로버의 꽃말)보다 행운(네잎클로버의 꽃말)이 더 좋거든!" 물론 어린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 그 친구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진 알 수 없지만, 나는 어느 날 어디서 찾아올지 모를 행운을 기다리는 것보다 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며 사람의 덕목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필로테아 님, 나는 그대도 세잎클로버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와 가정에 행복이 세잎클로버처럼 가득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