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망지 Oct 30. 2022

내 수직의 공간이 넓고 길면 길수록 내 꿈이 더 자라날

두시부터 다섯시간, 서른두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서른번이 넘게 꼬박꼬박 글을 쓰게 될 줄 몰랐습니다.   


거북목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한시간에 한번씩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봅니다 .

고개를 올리고, 고개를 들고, 고개를 높이고, 고개를 젖히고, 고개를 뒤로하고, 하늘로 시선을 돌리는 행위를 두고도 우린 많은 단어들을 갖다 붙일 수가 있네요. 이게 언어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언어의 매력입니다. 제가 그 언어를 몇십년 생활처럼 사용한 것이 아니라면 이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들을 체득하긴 어렵겠죠.


 요즘 언어교환을 하고 있어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배울 때는 단어의 뜻이 겹치는 단어들이 뭐 이렇게 많나 싶으면서 짜증이 났는데, 막상 한국어로 비슷한 단어들을 구분해서 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니, 설명이 안 되어서 막막했습니다. 예를들어, 황당과 당황은 정말 미묘하지만 서로 엄연히 다르잖아요. 이런 것들은 언어의 장막을 건너서 전달하기엔 어렵습니다. 본인이 직접 장막안으로 들어와 노출이 되는 수 밖에 없어요. 이 조그만 지구에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도 신기한데, 저마다 조금씩 그리고 완전히 다른 언어들로 떠들어대는 것도 새삼 신기합니다. 생김새도 언어도 문화도 사고도 모두 다른 우리가 그럼에도 같은 인간으로 묶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보편적인 생각들, 보편적인 마음들, 그래도 지구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끼리 공유되는 보편성이 있어서 우리가 우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직도 100%의 상호이해는 되지 않지만 영어를 아이템으로 소통하며 사귄 다른 문화권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와 참 다르지만 또 나와 참 비슷해요. 그럼에도 만국공통으로 지난한 인간관계에 머리를 싸매고 지쳐하기도 하고, 아무리 좌절되어도 사랑을 잃고싶어하지 않아하고, 울고 웃고 화내는 순간들의 싱크가 어느정도 맞는 걸 보면, 우린 모두 동료 지구인이긴 한가봅니다.  


고개를 위로 향하게 하는 행위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실내면 천장이, 야외면 하늘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천장의 ‘천’은 자연스럽게 하늘 천을 의미 하겠네요. 고개만 들면 하늘이 내 눈에 들어온다니, 다시금 지구가 나를 당겨주고 있어서 고맙습니다. 닿지 않을 곳에 펼쳐진 하늘이 달갑습니다. 아무리 날뛰고 손을 이리저리 뻗어대도 제겐 제한이 없네요. 원하다면 풍차돌리기도 힘껏 행해도 좋습니다. 우리의 키는 뭣모르고 가득히 커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머리위론 닿을 것이 하나 없으니


그래서 실내의 천장도 조금은 고려할 사항입니다. 전 천장이 낮은 곳에 들어가면 위축되곤 합니다. 평소에 제자리뛰기를 할 일은 없다지만, 점프하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위치에 천장이 자리잡고 있는 건, 사람에게 다소 위협감을 주곤하죠. 이래서 비싼 집들의 천장이 하늘 무섭게 위로 뚫려있나봅니다. 내 수직의 공간이 넓고 길면 길수록 내 꿈이 더 자라날 수 있는 느낌. 평소엔 모니터만 쳐다보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저희 사무실에 천장도 꽤난 높습니다. 겉에서 보면 지붕의 모습이 거대한 삼각뿔 같기도 한데, 요새처럼 천장이 커다랗고 길쭉합니다. 꽤나 낭만스럽게 근처엔 창문도 달려있고요, 어떻게 보면 라푼젤이 갇혀있던 탑의 꼭대기 같기도 합니다. 라푼젤은 아니지만 저도 꼼짝 9시간은 여기에 갇혀있긴 하네요. 나름의 널널한 수직공간을 소유하고 있는 저는 오늘도 이렇게 손가락으로 공상과 망상을 피워냅니다. 


제 공상은 대개 쓸데없는 연상 작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점심시간 이후, 다 지워진 입술을 덧칠하고자 립스틱을 바르는 순간, 이걸 어디서 샀더라를 떠올리는 순간, 포르투의 화장품가게가 떠오르는 순간. 이런 연쇄작용들을 겪고나면 그 기억들이 울컥울컥 그리운 때가 있습니다. 유명한 3대 맛집을 구태여 찾아간 때가 아니라, 동 루이스의 강가를 거닐다가 문득 나타(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가 먹고싶어서 강변에 있던 아무 가게에서 사먹은 1.2유로짜리 나타가. 그 맛과 그 냄새와 내가 바라보던 강물의 풍경까지, 나는 비록 립스틱을 사서 돌아왔지만, 결국 기억을 보관해온 것입니다. 아무리 사진을 많이 남겨왔어도 무형의 것들은 기억을 촉발하기엔 너무도 미미합니다. 두툼한 립스틱은 손에 잡히고, 그날들의 잡히진 않던 잔상들을 데려와줍니다. 여행지에서 매 도시마다 이런 핑계들로 거침없이 물건들을 차곡차곡 사던 제가 조금은 기특합니다. 어찌됐건 남겨온게 많으니 기억할 장치들도 많아졌네요.  


위로와 사랑을 여기에 두고,

2022년 10월 25일 PM 3:43


이전 18화 금성의 하루는 116일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