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쓰는 자화상

인생의 제2막

by 선인장


자화상, 自畫像/ self-portrait, 말 그대로 나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그림, 초상화이다. 자화상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protrahere’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의 원래 뜻인 '끄집어내다', '밝히다'가 초상화를 그린다는 뜻의 ‘portray’가 된 것이다. 결국, 자아라는 의미의 self와 portray가 합하여 이루어진 'self-portrait'이라는 단어는 ‘자기를 끄집어내다, 밝히다’라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모든 자화상에서 공통분모처럼 발견되는 욕구는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했다.

자화상은 그러니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화 하여 사진처럼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 자의식을 담아 본연의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어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나 자신을 온전히 알고 살아갈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아닌 남에게 보이는 나로 맞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사춘기에 자기다움에 대한 지각인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기 전까지…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이후에도 대부분은 부모님이 원하는 나, 그리고 사회에서는 팀장님이 원하는 나, 팀원들이 원하는 나,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나, 그리고 관계에서는 친구 또는 파트너가 원하는 나로 맞춰가면서 생활해 온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또 습관처럼 확인하는 소셜미디어에서 많은 사람의 공유하는 진실인지 왜곡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의 무수한 자랑거리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그것들과 끊임없는 비교를 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 또는 나의 선택에 있어 그 본질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세상의 기준이, 혹은 타인의 시선이 나를 지배하고 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서른이 다 되어 처음 하게 된 나의 꿈을 위해 떠난 뉴욕에서의 독립은 생애에 있어서 내가 처음으로 내쉰 오롯한 나만의 첫 호흡이었다. 온전하게 나 혼자만의 고독. 나는 아무도 없는 타지에 혼자 떨어진 외로움과 두려움보다 나 혼자만의 그 고독과 자유로움이 경이로웠다.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부터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2막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뉴욕의 아침도 일어나자마자 침대 주위를 더듬거리며 큼직한 렌즈가 들어간 안경을 찾는 일로 시작했다. 어릴 땐 늘 어디서든 책을 끼고 살았던 터라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안경을 써서, 이제는 그 시력이 더 많이 나빠져 말 그대로 뺑뺑이 안경이 되었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말 그대로 눈을 뜬 장님이 된다.

대학 때부터 안경을 쓰고는 절대 외출을 하지 않는 것이 내 철칙이었다. 뺑뺑 돌아가는 안경을 쓰면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쌍꺼풀 수술을 해주고 싶은 작은 눈이 반으로 쪼그라들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너무 자신감이 없어서 어쩌다가 안경을 써야 하는 날에는 온종일 땅만 쳐다보고 걸었다. 대학 때 잦은 밤샘 작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경을 써야 하는 날에는 짓궂은 동기, 선배들이 내 안경 쓴 모습이 영 아니라며 너무 안타깝다고 같이 돈을 모아서 라식을 시켜주자고 했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인데, 고등학교 때부터의 안경에 대한 혐오까지 더해져 이것이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남아버렸다. 그래서 집 밖을 나갈 때는 아무리 잠깐이든 동네에 장을 보러 가게 되어도 렌즈를 꼭 착용하고 나갔다.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 짙은 갈색의 아이라이너를 눈꼬리를 살짝 빼서 그려주면 마치 세일러문이 마법 봉을 흔들어 변신할 때처럼 온몸에 자신감이 퍼져 올라왔다.

이젠 렌즈를 20년을 사용했더니 눈이 너무 건조해지고 충혈되어서 일회용 데일리 렌즈조차도 눈이 건조해서 몇 시간밖에 착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이제 렌즈를 그만 착용하는 게 좋다고 내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무래도 눈이 너무 불편해서 안경을 좀 써보고 다닐까... 비싸면 더 예쁜 안경테가 있지 않을까... 해서 비싼 수입 안경테들만 골라서 구매도 했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큰 렌즈로 얼굴을 더 가리려 했다. 아무리 예쁘고 어울리는 안경테를 사더라도 압축을 두 번, 세 번... 다섯 번을 한 안경 렌즈를 끼워 넣으면 렌즈 크기가 커질수록 더 굴곡이 생겨서 그 눈의 쪼그라듦이 더 외계인같이 보이게 되어서 무용지물이었다.


“지수야, 나가자.”


“이 아침에 어딜?”


“담배가 다 떨어졌어. 배도 고프고. 얼른 따라와.”


“음.. 옷도 입고, 세수도 하고, 렌즈도 갈아 끼고 하려면… 10분만 줘.”


“야, 무슨 길 건너가는데 세수고 렌즈야. 이거 내 것 걸치고 그냥 신발 신고 따라와.”


엉겁결에 세수는커녕 양말도 못 신고 운동화를 신고 유카를 따라나섰다. 눈이 반절로 쪼그라든 안경 아래의 눈에는 모래알만 한 눈곱도 그대로 붙어있었고, 얇은 티셔츠 한 장이 신경이 쓰여 자꾸 유카가 건네준 후드 점퍼로 앞자락을 자꾸 움켜쥐었다. 유카는 어젯밤에 늦게 들어와서 화장도 안 지우고 잤는지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가 눈 주위에 뭉개져 번져있었다.


“말보로 라이트 하나랑 치즈 베이컨 에그 베이글 두 개, 커피 두 잔이요! 지수, 여기 치즈 베이컨 에그 베이글이 맨해튼 최고야. 기다리는 동안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자. 나와.”


유카가 나눠준 담배를 한 대 물고서 깊고 차가운 숨을 몇 번 쉬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잠옷 바람에 맨발로 운동화를 신고 안경을 쓰고 기름기 가득한 얼굴로 세수도 안 하고 집 밖을 나와서 집 앞 구멍가게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여자 둘이서 길에서 아침부터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리고 마치 투명 인간이 되어버린 듯 그 누구의 시선도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베이글을 들고 집에 들어와 한입 베어 먹었다. 2불짜리 베이글과 1불짜리 설탕 커피의 조합이 그렇게 환상적이었던 것인지, 나의 금기들을 박살 내버린 그 끔찍하게 어색하고 완벽하게 통쾌했던 아침 30분이 환상적이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 이후로 나는 지금도 뉴욕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꼭 빼먹지 않고 첫날 아침 길거리 작은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치즈 베이컨 에그 베이글과 1달러 설탕 커피를 시켜서 먹고는 꼭 같은 깊은숨을 내뱉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달라져 갔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가까운 구멍가게부터 시작해서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할 때도 안경을 쓰고 나갔고 그렇게 매일 찰떡같이 발라대던 비비크림도 딱히 중요한 만남이 있지 않은 날은 바르지 않기 시작했다. 가까운 동네에 나갈 때에도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 30분씩 하던 고민 대신, 그냥 편한 차림으로 모자 하나 눌러쓰고 나갔다.

심지어 남자 친구를 만나는데도 나의 금기 사항들이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금기들이 풀리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금기들까지 풀려갔다.


뉴욕에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와 말싸움을 해보거나 이전 남자 친구들과도 말다툼을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물어보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냥 싸울 일이 없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나는 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셨던,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봐야 한다는 '성인군자'이어야 했다. 누군가가 들으면 기분 나쁜 말을 해본 적도 없었고, 내가 들어서 기분 나쁜 말은 그냥 내가 삼켜버렸다. 심지어 전 남자 친구라는 작자가 바람을 피워댔을 때도 화를 내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화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몰랐고, 내가 섭섭한 내 감정을 내세우면 그 순간 병신 같게도 내가 오히려 미안해졌으니까...

그런데, 금기들이 풀리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충실해지고 싶어 졌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 자신을 찾고 싶었다.


택시가 안 잡히던 어느 밤, 불법으로 돌아다니는 택시 간판도 달지 않은 까만 개인택시가 내 앞에 서서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봤을 때 그가 쳐다본 동양 여자애는 목적지가 멀지도 않았고, 자세히 보니 친구도 두 명이나 데리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에게 무식하고 공격적으로 중얼대면서 바로 떠나버렸다.

나 하나 가만히 참았으면 모두가 다 그냥 조용히 넘어갈 일이었다. 그 사람도 멀리 가는 손님을 태우고 싶었을 텐데, 멀리 가지 않는 동양의 작은 여자와 두 명의 동양 남자에게 괜한 성질을 낸 거겠지... 인종차별주의 자일 수도 있겠지…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무례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참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앞뒤 블록의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한 큰 소리로 그 택시 뒤통수에 대고 “F*** ***!”라고 악을 질렀다. 주위의 사람들이 쳐다봤고 나에게서 그런 반응을 처음 본 내 지인들도 모두 너무 놀라 내 얼굴을 그냥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너무 후련했다. 그 사람에게 욕을 해서 후련한 것보다 내 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 시원했다.

한편으로는, 나는 나 혼자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 동양인으로서, 사회적 약자로서 많은 역할로 살아가야 했다. 누군가가 인종과 성별에 대한 무시의 태도를 걸어올 때 약자로서 그냥 참고 넘어가지 않고, 밟으면 꿈틀 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다음번에 그들이 나와 같은 다른 이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런 사람이 열 명, 백 명, 그리고 천 명이 되어야 우리가 그제야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보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무시하지 말라고, 난 너 따위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그리고 언젠가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또 만나거든 똑같이 행동해서 욕먹지 말라고.

그렇게 하나하나,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던 너무 높아 그 밖에 어떤 세상이 있긴 한 건지 궁금해할 수도 없었던 벽을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그동안 부모님이 바라보던 나, 친구들이 바라보던 나, 연인이 바라보던 나, 그리고 나와는 아무런 연고도 상관도 없던 그 무수한 사람들이 바라보던 ‘내가 되어야 했던 나'로 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며 살아왔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 내 본연의 모습인 줄 알고 나를 잊고 살아오던 것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나’를 온전히 알고 난 뒤에 사회적 동물로서의 역할이 두 번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에서의 독립은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 자신을 온전히 알아가는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의 과거들을 뒤로한 채, 이제 온전히 내가 주인인 시간을 즐길 차례였다.




- Photo by 선인장. New York,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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