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편지

[나를 만들어 준 시간들]

by 선인장


어릴 적 내가 제일 하기 싫어하던 숙제는 공문 수학 학습지 숙제와 피아노 숙제였다.

산수도 재미없는데 매일 다섯 장씩 꼬박꼬박 숙제해야 한다니… 공문 수학이 너무 끔찍하게 싫었지만, (주)대교에서 발행하는 한 달에 한 번(?) 발행하는 작은 책자를 기다리는 행복도 있었다. 어릴 때 책을 읽는 것을 워낙 좋아했던 나는 그 작은 책자에 담긴 단편 창작물들이 가볍게 읽기 쉬워 좋았다.


어느 날 그 작은 책자에서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라는 교훈이 담긴 재미있는 글을 읽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께 배운 교훈 덕분에 더 크게 느꼈던 좋은 감동을 아버지께도 전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퇴근하시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늦게까지 야근을 하시고 들어오신 아버지께 달려가 책자를 내밀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아빠, 아빠, 내가 오늘 글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아빠도 읽어보세요! 여기요!”



아버지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시큰둥하게 알았으니 나중에 읽어보겠다고 하시고는 거실로 가서 소파에 몸을 기대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와 반응에 괜히 머쓱해져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방으로 들어가서 괜히 인형을 집어 들고는 서운함을 달래다 괜스레 눈가에 눈물이 슬쩍 맺혀서는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떠보니,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머리맡에 내 이름이 적힌 작은 종이봉투가 놓여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아빠의 잘생긴 손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빠가 밤에 유진이가 읽어보라고 한 글을 읽어보았단다.

우리 유진이 덕분에 아빠가 이렇게 좋은 글을 읽게 되어서 고마워.

유진이가 아빠 생각하면서 읽어보라고 했는데, 아빠가 어제 집에 도착하고 너무 피곤해서 바로 읽어보지도 못하고, 따뜻하게 대답해주지도 못해서 아빠가 많이 미안해.

이 글에 나온 친구처럼 늘 친구들을 아끼고, 어른들께 예의 바르고, 선생님을 공경하고, 동생한테 양보하는 우리 유진이의 모습이 아빠는 늘 정말 감사하단다.

이렇게 좋은 글도 많이 읽으면서 더욱 생각 깊고, 마음씨 착한, 예쁜 우리 유진이가 되기를 바랄게.


사랑한다 우리 딸.


198x. x 월 아빠가


아버지께 처음으로 받은 손편지였다.

나는 늘 아버지의 손글씨를 좋아했다. 엄마도 늘 아빠의 손글씨가 예쁘다고 칭찬을 하셨더랬다. 또박또박 쓰시는 글씨체는 마치 슈퍼맨으로 변신하기 전의 클라크 켄트처럼 반듯하고 젠틀해서 멋졌고, 흘려 쓰시는 글씨체는 마치 변신 후의 슈퍼맨처럼 그 바쁘면서도 섹시한 매력이 있었다.

손편지에 적힌 글씨는 반듯하고 젠틀한 그것이었다. 편지를 읽는 내내 왠지 아버지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 들고, 그 따뜻한 아빠의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괜히 엄마나 동생이 볼까 봐 손으로 연이어 훔쳐대곤 했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그냥 작은 책자의 몇 페이지 안 되는 이야기뿐이었는데… 괜히 서운했던 내 여린 마음이 유치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리고 그 별거 아닌 몇 쪽의 글을 밤늦게 읽으시고는 내가 혹시 서운했을까 봐 피곤한 몸으로 한 자 한 자 아버지의 마음을 전해주셨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 미안한 마음에 아침 내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온몸으로 퍼져 따뜻해졌다.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사회인이 되어보니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저녁 시간을 온전하게 나를 위해 보내는 것도 버거운데, 회사원으로서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집에서 또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내느라 본인을 위한 시간을 감히 희생하셔야 했던 아버지와, 늦은 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전해주셨던 그 작은 선물이 언제까지고 소중하고 뭉클한 추억으로 가슴속에 남아있다.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어릴 때 의례 당연하게 누렸던 혜택들이 모두 뒤에서 부모님의 끊임없는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 청소를 하루 날 잡아서 꼼꼼하게 하는 것도 큰일이고, 매끼 무얼 해 먹을까 고민하기 귀찮아 샌드위치로 뚝딱 때우는 일이 많은 요즘, 그 일을 매일같이 몇십 년을 마땅히 해내시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그 예전 지금보다도 더 꼰대 같은 상사분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하루하루를 견뎌내셨을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에 대해 이제야 철이 들어 감사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더욱 겸손하게 매일매일을 돌아보게 된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 Photo by 선인장. 서울,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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