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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Feb 25. 2018

크레셴도 크레셴도 : 안목 높이는 법 14

<1828년 12월 6일>

-1828년 12월 6일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남자네요.”


 지나의 목소리다. 누워있는 곳이 콜론 시립병원이란 것을 깨달았다.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정원에서 발화된 불이 겨울바람을 타고 매섭게 옮아 붙어 집을 모두 태운 것으로 추측됐다. 뛰어들어간 올드벅과 나를 빼곤 사람 흔적은 포착되지 않았다.


 “꼬박 나흘을 잠만 잤어요. 그리 위험한 사람들과 어울리더니, 언젠가 그럴 줄 알았어요. 제 명에 죽고 싶진 않은가 보죠?”


 그녀 특유의 신랄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린다. 오른손을 뻗어 지나의 볼을 어루만진다. 핏기 도는 살아있는 사람의 감촉이 느껴진다. 빨개진 두 눈으로 나를 가만히 노려보는 그녀를 보니 괜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 그림들은?”


 지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내저었다.


 “노라 선생님이 보관 중이에요. 되찾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당신, 올드벅 몸속에서 얼마나 많은 그림이 나왔는지 모르죠? 가슴팍은 그렇다고 쳐도, 바지, 양말, 속옷…. 그런 급박한 상황에 어찌나 그림들을 정성스레 몸속 구석구석 숨겼는지. 두루마리처럼 된 그림이 자그마치 스무 장이 넘는다고요. 주인이라고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지, 그걸 품에 안고 나온 올드벅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불길함 말고는 남아있는 게 없는 것이에요.”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잠깐 망설였다. 불같은 여자였다. 말을 하다 아차 한 게 아닐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숨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니까…. 일단 회복에 집중해요.”


 베이커 씨는 사라졌고, 올드벅은 죽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깜짝 놀랄 소식을 동시에 듣는 데도 가슴은 전혀 요동치지 않았다. 아주 진한 블랙커피가 먹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미안해.”


 “참 이르게도 나오는 말이네요.”


 지나는 그 말을 듣고 내 이마에 손을 한 번 올리더니 “이제 가봐야겠어요”라고 말하며 문밖으로 나갔다.


 “저 사람, 종일 뜬 눈으로 당신을 보살폈어.”


 그녀가 나가기를 기다린 듯 스멀스멀 걸어온 건 노라 할멈이었다. “베이커가 날 찾아왔었네.”




 노라 할멈은 며칠 사이 흘러가는 시간과 정면충돌한 것처럼 폭삭 늙어 보였다. 병원의 분위기 때문인지 흡사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약속을 지켰다고 했네.”


 그녀는 능숙한 자세로 나를 덮고 있는 이불의 숨을 툭툭 고르면서 말했다.


 “무슨 약속이요?”


 “자네 여동생과의 약속.”


 “그게 무슨?”


 “그 남자, 자네 여동생이 아니었으면 이따위 마을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


 노라 할멈은 내가 집을 떠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베이커 씨가 서 있었다고 했다. 늘 보던 그 차림새였다. 아무 특징 없는 짙은 회색 같은 표정으로 내가 앉은 의자에 그대로 앉은 그가 처음 꺼낸 말은 내 여동생을 아직 생생히 기억하느냐는 물음이었다고 했다.


 “아직 소년과 소녀이던 시절 둘이 약속을 했다더군. 자네 여동생이 원했던 모양이야. 베이커의 붓질에서 나타나는 이 마을의 구석구석 모습을 말일세. 그 6개월도 안 된 시간 사이에서 툭 튀어나온 약속을 지키고자 그 미련한 녀석은 훈장도 마다하고 마을로 왔던 거야. 그 애가 그렇게 될 것 또한 예상했던 모양인지 담담하게 말하더군. '내가 놀랐던 건 두 가지요. 마을이 옛날처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 또 그 친구가 아직 살아있다는 점. 어린 시절부터 울다 지칠 때면 언젠가 자신은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것 같다고 말하던 아이였으니까. 결국, 그렇게 됐지만 말이야. 그림 따위도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쩌면 그렇게 건조하게 말할 수 있는 건지. 그러고는 떠났어. 신이 일부러 이때를 노린 걸지도 모른다고 중얼대면서.” 


 그녀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는 노라 할멈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의 눈동자를 처음 들여다봤네.”


 그녀는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다 이내 입을 닫고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림은 아직 쓸 데가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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