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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Mar 10. 2018

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 8

<오름>

#8.


 꼭 한라산이 아니어도 됐을지도 모른다. 북한산이나 청계산처럼 가까운 산을 가도 이 충동은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숨이 헐떡거릴 만큼 까마득히 높은 곳을 올라가고 싶었다. 높은 곳에서 탁 트인 낮은 곳을 보며, 병든 심신에게 다시 잘해보자며 말을 걸고 싶었다. 고작 이곳에서 보는 세상도 이렇게 큰데, 네가 가진 고통은 얼마나 미미한 것이겠냐고. 궤변같은 말이지만 효과는 있다. 응급병실로 병문안을 갔을 때 주변 환자들을 보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같다.


 한라산 등산로 중 하나인 성판악 코스를 걸을 요량으로 오전 6시에 눈을 뜬다. 날씨가 좋지 않아 정상까지는 오를 수 없다는 게 직원의 설명이다. 오늘도 놓치면 이곳을 온 이유가 사라진다. 밖을 나서니 크레파스 가루 같은 눈이 두 볼을 비빈다. 2009년 1월에 찾은 이후 9년 만에 다시 온 한라산은 변함없는 설국(雪國)이다. 이름 모를 나무와 풀은 하나 같이 눈꽃 옷을 입었다. 걸음을 내디뎠다. 아침은 먹지 못했으나 호주머니에는 에너지바가 있다. 물을 챙겨오지 못한 게 생각난다. 정상까지 갈 수도 없기에 큰 염려는 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등산과 마라톤을 좋아하게 된 건 당연하다. 운동을 꾸준히 한 덕에 체력과 기초대사량은 꽤 높은 편이다. 그러나 입 여는 일보다 입 닫는 일을 좋아하는 나에게서 축구, 농구와 같은 운동은 흥미가 가지 않았다. 주로 혼자 해도 되는 운동을 찾았다. 남들은 술을 먹고, 컴퓨터 게임 등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 때 나는 굶주린 낭인처럼 게걸스럽게 글을 쓰고 발을 움직였다. 걷고 뛸 때는 그 염려가 손바닥 위 모래알같이 사그라든다. 충분히 움직이면 겨울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노천 온천에서 몸을 녹인 것처럼 개운하다. 오늘 하루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푹 담길 만큼 많은 눈을 보고 싶다던 강 기자가 오기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걷는 동안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인사하는 G도 떠오른다. 종종 겨울 산을 오른다던 그 말이 생각나서다. 이 아이는 나와 참 다른 아이다.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 먼저 말을 걸고 먼저 말을 내민다. 깊은 내면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해사한 모습으로 어딜 가도 사랑받는 느낌이다. 나는 타인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성격이다. 내가 안 가진 것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 아이와 오랜 시간 함께 있는 덕에 최근 몇몇 비결을 살펴볼 수 있었다. 


 G는 어떤 사람을 마주해도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사람과 마주한 표정으로 인사한다. 어떤 의도가 담긴 미소가 아니기에 상대방은 벽을 허물 수밖에 없다. G는 상대방의 이름을 자주 부른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용건을 말하기에 앞서 이름을 톡톡 꺼낸다. 대화하기 앞서 그 사람의 존재를 되새긴다는 느낌이다. '크리스마스'같은 이 아이와 있으면서, 나는 그 예절에 물들기로 했다. 


 걷는다. 한라산은 높이에 비교해 가파르지 않다. 페이스만 유지하면 무난히 올라갈 수 있다. 눈발이 차츰 굵어지고 바람이 점점 날카로워진다. 위에서 바라본 아래는 참 하찮게 보인다. 점차 하찮은 것에 간절해지고 있던 나에게, 하찮은 것에 간절해지지 말자는 말을 건넨다. 모든 일을 동정의 눈빛으로 볼 힘이 오길 기도한다.



 계속 걷는다. 이따금 하늘을 보고, 고개 돌려 양옆을 본다. 온통 흰 눈이다. 가족, 연인, 친구들이 발자국을 새겨진다. 고요함을 걷는다. 그렇게 오전 10시쯤, 더는 갈 수 없는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한다. 웅성대는 대피소를 빙 둘러본다. 9년 전 이때는 7명의 철없는 아이들이 시끌시끌하게 올라왔다. 옷과 신발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낸 후 왔던 길을 돌아간다. 기분 좋은 열이 올라오면서, 오늘 하루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을 한다.


 "율이. 한라산 사진 좀 보내줘." 때마침 G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필름 카메라를 가져올 걸 그랬어." 내가 말한다.


 "괜찮아. 눈에 잘 담고 있지?"


 이 아이는 꼭 이럴 때만 나이 먹은 티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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