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
#9.
중국에서는 가장 여유로울 때를 삼여(三餘)라고 한다. 세 조건은 밤과 겨울, 비 오는 날이다. 한라산에 다녀온 후 오후부터 종일 게스트하우스에서 뒹굴었다. 눈은 기다렸다는 듯 옅어졌고, 자연스레 삼여의 순간이 찾아왔다. 마지막 날 밤이라고 해서 아쉽지는 않다. 지친 몸을 회복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지만, 무엇이든 아쉬울 때 그만두는 것이 낫다.
나는 지난해를 보내면서 차분해지는 데 더 익숙해졌다. 더 차분해질 게 뭐가 있느냐며 손사래를 치는 이들은, 내면의 고요한 소용돌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확실히 지난해 말부터는 '좀 더 여유로워진 분위기인데?'라는 말을 들을 때가 늘었다. 한 달 반 간격으로 보는 미용사 형, 누나마저 '더 여유로워졌네요'라 말을 인사처럼 건넨다.
오직 나를 위해 하는 필생의 일이 있다면, 읽은 책의 인상적인 구절을 다른 노트에 옮겨 기록해두는 것이다. 20살부터 29살까지 벌써 9년을 이어왔다. 이제는 이 문장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는다면 페이지가 1000장은 훌쩍 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좀 더 차분해지기 전 나는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문장을 수집하는 데만 몰두했다. 장르 구분 없이 책을 와작와작 씹어댔다. 문장은 쌓이는데 읽을 시간이 없으니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이번 짧은 휴식 기간에 나는 아픈 전화와 문자를 뒤로하고 그 페이지를 몽땅 읽었다. 내가 좋아하고,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만 모여있다 보니 읽는 속도가 빨랐던 덕이다. 20대 초중반에는 하루빨리 30살이 되고 싶었다. 그 나이에 성큼 발을 딛다보니 이제는 빨리 30대 중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도 나는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돼 있을까. "너는 내 나이가 되면 나보다 더 단단해질 거야." 누구보다 단단해 보이던 그 사람이 나를 두고 해준 말을 부적 삼아 한 발씩 조심히, 성실히 걸을 뿐이다.
이날 밤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아직 되새기지 못한 문장들을 집어넣고,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을 들춰봤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몇 번이나 손을 댔지만 압도되는 느낌으로 완독에 실패한 그 책이다. 지금은 반 정도는 읽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아직은 이 작품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훨씬 좋다.
취재원을 찾는 동기에게 메시지가 온다. 너 주변에 이런 사람 있느냐고. 나는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니는 개 '콩고'의 사진을 보낸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 어디냐고 되묻는다. 나 제주도야. 그 말에 깜짝 놀란 그는 오타투성이의 말을 쏟아낸다.
율아, 네가 언제. 율아, 네가 어찌. 율아…. 그래도 이름을 되새겨 읊는 건 애정이 담겼다는 표시일 것이다. "조율, 운율, 선율…. 율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면 시(詩)와 피아노가 떠올라요. 글자 안에 음(音)이 담겨있는 것 같아요." 애초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던 '율'이라는 글자를 더욱 좋아하게 된 건 이 말 덕분이다. 취재원을 알려주지 못한 탓에 심술을 부리던 그는, 그래도 끝까지 '율'의 밧줄을 놓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이 고마웠다.
시간은 단단히 흘러갔다. 몸이 아파지기 시작한 건 모두 잠든 이 날 밤부터였다.
으슬으슬 춥고 무엇보다 속이 쓰린 게 음식을 잘못 먹은 탓으로 추정된다. 견딜 수 없어 화장실로 가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눈을 감고 끙끙대니 녹슨 배가 생각났다. 내 몸 위로 수십 척의 녹슨 군함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다. 빠져나오려고 해도 수렁처럼 끌어오는 통에 이도 저도 할 수 없다. 버둥거린다고 무슨 수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가만히 있겠다고 무슨 수가 생기는 것 또한 아닌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나는 이날 밤 악몽을 꿨다. 개미굴 속에서 다시 밧줄 대여섯 개가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