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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제주 #1

<출발>

by 이원율

-그만.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봄날, 강원도의 산마루에 몸을 놓고 며칠간 책을 양껏 읽었더니 이 생각이 났다. 깔린 모포 옆에서는 삽과 못, 망치가 먼지와 흩날렸다. 누군가가 던져놓은 먼지 쌓인 책을 뒤적이며 이제 곧 해가 뜰 거라며 다독이던 때다. 내가 있던 곳은 쥐와 꼬마집게벌레 따위가 있던 작은 컨테이너 안이었다. 나는 그 안에 쌓여있는 책을 들고 코를 킁킁댔다. 물론 냄새만 맡은 건 아니고 보기도 많이 봤다.


이때 처음 생각했다. 음식이 아니라 어떤 몸짓 내지 행동에도 한계치가 있다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만 그런 감정을 느낄 만큼 한 가지 일에 신경을 기울인 적 없어 못 느꼈을 뿐이었다.


-더는 못 하겠어.


6·13 지방선거 분위기가 무르익던 그때, 기시감에 빠진 듯 이 생각이 다시 피어났다. 딱 그런 느낌이다. 이만하면 충분히 견뎌왔다. 쉴새 없이 말을 하고 단어를 모았다. 이를 맞춰 옷에 묻은 먼지 털듯 머리를 탈탈 털어 문장을 쏟아냈다. 불꽃 같던 한 주의 금요일엔 글자만 봐도 속이 울렁댔다. 내가 싫어하는 '의', '것' 등이 흉악한 악당이 돼 발로 차는 식의 꿈도 꿨다.


그러는 동안 한 사람이 내 일상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두어 사람은 내 일상에서 완전히 떠났다.


그 사람 말처럼, 좋은 걸 받으면 반드시 무언가가 사라지는 법이다. 때때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셔야만 겨우 이해되곤 한다. 나는 더 민감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기쁜 감정은 더 넓게, 콕콕 찔러대는 통증은 더 깊게 느껴보고 싶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픔도 한순간 집중해서 느낀 뒤 훌훌 털어내고 싶을 때.


그런 다음 제 몸을 살살 핥아대며 다독이고, 이로써 불안을 떨쳐내고 자연스러움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러려면 일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무리해서 서두르지 말 것.
같은 패턴을 반복하지 말 것.
꼭 거짓말을 할 땐 되도록 단순한 거짓말을 할 것.


내 문(門)을 열고 온 그 사람과 함께 휴가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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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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