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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가벼움과 무거움≫ 소품:4

<4> 리더의 핵심 조건

by 이원율

소품집 4 : 리더의 핵심 조건 (2018.6~)


나이든 이가 가장 후회할 땐 잘못된 선택을 돌아볼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B.C.100~ B.C.44)부터 플라비우스 스틸리코(Flavius Stilicho·365~408)까지.


고대 로마 시절, 그 시간에만 수백, 수천 명 전쟁 영웅을 만든 이탈리아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리더의 조건을 세 가지로 나열한다.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 마지막 하나는 시대 요구에 응할 수 있는 능력. 즉 운이다.


박원순 시장이 6·13 지방선거에서 거뜬히 승리하고 3선 서울시장이 된 데는 부정할 수 없는 큰 운이 따랐다.

대표적인 건은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다. 그가 미투 운동에 안 휘말린 걸 두고 운이 좋았다고 칭하는 게 아니다. 핵심은 타이밍이다. 지난해 10월 미국 할리우드에서 불붙은 이 운동은 올해 1월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딱 지방선거가 무르익을 무렵이다. 어떤 집단에서 고도의 계산으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촉발한 게 아니라면, 미투 운동은 당시 시점에서 한 끗 차이 과거 혹은 미래에도 시작될 수 있는 일이었다.


폭풍 속 불과 몇 달 만에 박원순 시장의 정치적 라이벌이 상당수 사라졌다.


잠재적 대권 라이벌인 안희정 충남지사, 당시 서울시장 경선에 나선다고 밝힌 더불어민주당 민병두·정봉주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박원순 시장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는 동안 적수들은 알아서 없어진 모습이다. 그는 당연히 안 해야 할 일을 안 했다는 이유로 지지율이 올라가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장 경선 최대 라이벌로 꼽힌 박영선 의원도 어이없게 추락한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벌어진 특혜 응원 논란 때문이다. 6·13 지방선거 직전 박영선 의원 보좌관을 만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응원 장소 입장 등 모두 공식 절차를 밟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막이 어찌 됐든, 일반 시민이 볼 땐 올림픽과 전혀 상관없는 한 국회의원의 출연 욕심으로 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박영선 의원은 이미지에 뼈 아픈 타격을 입었다. 온갖 논란을 무릅쓰고 최종 경선에 올랐지만 당원 상당수는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이 또한 '가만히' 있던 박원순 시장에겐 호재였다.


취재 현장에 있던 기자 처지에서 볼 때, 올해 그의 가장 '운수 좋은 날'은 지방선거 투표 10일 전인 6월 3일이다.


서울 용산구의 4층짜리 상가 건물이 말 그대로 와르르 무너진 날이다. 1~2층은 음식점, 3~4층은 주거공간인 이 시설은 평소 수십 명의 인구가 들락날락하던 건물로 조사됐다. 그나마 일요일에 사고가 난 덕에 상주 인원은 60대 여성 한 명뿐이었다. 이 여성도 비교적 가벼운 상처를 입은 데 그쳤다. 당시 현장 전문가들은 최악 상황 시 수십 명이 그대로 매몰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찔한 일이었다.


부실시공, 안일 대응 등 문제점이 쏟아졌다. 특히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은 박원순 시장의 시대착오적인 도시재생사업이 사고를 불렀다고 집중 공격했다. 하지만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망자가 없어 이슈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정치는 오목렌즈, 볼록렌즈가 함께 있는 양면 거울과 같아 때때로는 작은 사안을 거대하게 키운다. 이와 반대로 큰 사안도 미미하게 만들곤 한다.


대형 사고로 번지지 않은 일은 천만다행이다. 평범한 이가 이렇게 한 번 되뇌는 동안 박원순 시장은 수십 수백 번 되뇌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부분이다.


그런 때가 있었다.


3선으로 다시 서울시청 문을 연 박원순 시장과 인터뷰를 하던 중 '운이 잘 따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준비를 많이 했다"고 답변했다. 그 말과 표정에서 나는 정색을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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