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자만 : 여의도·용산 통개발
8. 자만 : 여의도·용산 통개발 (2018. 7~)
전쟁이 끝난 후 뭘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가 결정된다. 승패는 이미 판가름이 났으니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그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를 쓸 때 가장 먼저 트라야누스(53~117) 황제를 다룬다. 이어 하드리아누스(76~138), 안토니우스 피우스(86~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모두 폭군 아닌 성군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이들을 현명한 다섯 황제란 뜻에서 오현제(五賢帝)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학자 대부분은 로마제국 쇠퇴기를 이끈 이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자 그 뒤를 이은 콤모두스(161~192)를 언급한다. 패전, 재정 문란, 화폐·물가 조작 등 구제할 수 없는 사상 최악 포학제(暴虐帝)로 꼽히는 인물이다.
기번은 왜 ≪로마제국 쇠망사≫로 다룰 첫 인물을 콤모두스 대신 트라야누스로 정했을까. 정점에 오른 순간 쇠락이 시작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오현제가 이끈 로마제국은 모든 분야에서 정점을 꽃피웠다. 하드리아누스가 죽기 직전 '로마가 멸망한다는 건, 전 세계가 멸망한다는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이런 번영이 계속될 때 도시 한쪽에선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바로 자만감이다.
박원순 시장은 2018년 6월 13일 직후 뭘 해도 되는 사람으로 조명됐다. 소통령(小統領)인 서울시장만 세 번째다. 즉시 대권 행렬 선두로 자리매김한 그는 탄탄대로 속에 놓인 듯했다.
박원순 시장은 당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 임명장에 찍힌 잉크도 덜 말랐다'고 손을 저었지만 그때만큼 이 이상의 자리, 즉 대통령을 꿈꾼 때가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야심에는 결코 한계가 없는 법이다. 정무부시장을 시의원급에서 국회의원급으로 바꾼 것, 정무수석에 시의원급을 둔 것 등도 모두 이에 따른 행보라는 분석이다.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정이의 말 중 이런 게 있다.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은 석부형제지세(席父兄弟之勢·대단한 부모 형제를 만난 것), 유고재능문장(有高才能文章·높은 재주와 뛰어난 문장력을 지닌 것), 이 중에서 가장 큰 불행은 소년등과(小年登科·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라는 말이다.
소년등과 부득호사(小年登科 不得好死)라고 해, 소년등과를 한 사람치고 좋게 죽은 사람이 없다는 섬뜩한 말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항간에는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을 피하라는 말도 있다.
이들 모두 능력 있고 열정도 넘칠 사람들일 텐데 왜 나쁜 말이 뒤따라올까. 자만감에 젖어 들기 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수차례 성공한 이가 어이없는 행동을 고집하다 몰락하는 일이 많은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은 엄밀히 보면 소년등과를 한 사례다.
요즘은 구청장도 시의원을 넘어 부시장(차관급) 경력이 있어도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직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 경험 시민운동가가 큰 위기 없이 3차례 연거푸 서울시장이 된 격이니 한국 정치판을 통틀어 이보다도 소년등과가 이뤄진 사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 성공 궤도에 올라, 밖으로 나서고 성과를 자랑하면 이는 곧 쇠락의 징조다. ≪공자, 논어≫
그는 현시점에서, 최대 고지에 올랐을 때 아이러니하게 그 땅에 균열이 생기는 경험을 차츰 하게 된다.
오만이란 언덕을 만난데 따른 것이다.
문제는 그의 입이었다.
여의도·용산 통개발 발언을 했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선명히 추측할 수 없다.
박원순 시장은 지난 7월 1970년대에 개발된 후 50년 가까이 지난 여의도를 업무·주거지가 어우러진 '신도시급'으로 재개발한다고 밝혔다. 또 용산에는 광화문 광장급의 대형 광장과 산책로를 만들고, 서울역~용산역 철로는 지하화한 후 그 위에 MICE(회의·관광·전시·이벤트) 단지와 쇼핑센터를 만든다고 덧붙였다.
이 말은 가열되던 부동산 시장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여의도·용산을 중심으로 집값이 고공 상승하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정부가 집값 잡기에 온 힘을 쏟고 있을 때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 그는 비판이 가라앉지 않자 그다음 달 "추진을 보류하겠다"며 물러섰다. 부동산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개발 계획에 불을 질렀다가 혼란만 키웠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게 된 셈이다.
박원순 시장은 싱가포르 출장 간 기자들과의 간담회 도중 이런 말을 했다. 당시 간담회장은 메시지실 직원 등 그의 말을 조정할 수 없을 만큼 시끄럽고 작은 곳이었다고 알려졌다. 기자들도 예상 못 한 폭탄 발언으로, 따로 모여 이 내용을 정말 기사로 써도 되는건지 의논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앞장서서 집값 안정화에 나설 때였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 배경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현 지지층의 테두리 내 소위 개발론자도 끌어들이고자 한 시도가 있지 않았을까 풀이될 뿐이다.
사실 이 발언에 대해 기자들 사이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도는 말은 따로 있다. 박원순 시장의 호기(豪氣)다. 그간 열심히 가다듬어 온 정치력도 결국 자만감을 이기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당시 어느 때보다 우쭐할 때였다. 아직 3선 성공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이번에는 '행정계의 노벨상'이라는 리콴유 세계도시상도 받게 됐다. 뭘 해도 된다. 이런 강한 발언을 해도 시민은 끝까지 나를 지지할 것이다, 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한다. 이에 따라 구의역의 '명예 기관사' 발언처럼 일단 지르고 본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타인 재산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어버이의 죽음을 잊더라도 재산 상실은 절대 잊지 못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문재인 정부의 집권 초기는 뭘 해도 되던 상태였다.
처음으로 비판 폭격을 마주한 게 다름 아닌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통제하던 때다. 정부의 말 한마디, 정책 하나에 돈이 자루째로 왔다 갔다 한다. 든든한 지지층도 내 주머니 속 돈에 대해서는 민감하다는 걸 보여주는 현상이다. 서민을 위한다는 이가 말 한마디에 신중하지 못해 집값을 들썩이게 한 원인으로 지목되니 후폭풍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모든 화살이 자신에게 쏟아진다고 생각하면, 병력을 지휘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알고 보면 박원순 시장도 억울한 면이 있긴 하다. 그의 발언을 보면, 여의도·용산 통개발이 하루 아침 만에 구상한 계획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나름대로는 깊은 고찰을 한 사안임이 확실하다.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 이 계획에는 그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그는 자만했다. 국토교통부가 집값 급등세 속 희생양을 찾는 상황이란 건 누구나 아는 상태였지만, 앞뒤 사정을 깊이 고찰하지 않고 '내가 이 정도'라는 것을 알리는 데만 집중했다.
박원순 시장은 차기 대권 주자 지지율을 단박에 깎아 먹고 만다.
그는 참지 못했다. 세련되게 말하지도 못했다.
또다시 정치력의 부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