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원율 Aug 30. 2020

무희들의 구원자, 혹은 파멸자

<8. 에드가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그는 여성 존중자인가, 여성 혐오자인가. 그는 무희들의 편이었나, 그 반대편이었나. 그가 전하려고 한 진실은 무엇인가.


   지금도 선인과 악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화가, 어쨌든 희대의 재능을 타고난 건 분명했던 화가, 에드가 드가(1834~1917)의 이야기입니다.



에드가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열네 살의 어린 무희'(1878~1881). 실물 크기의 청동 조각상입니다.


   지긋이 감은 눈, 앙 다문 입술이 눈길을 끕니다. 예쁘지도, 못나지도 않은 앳된 얼굴입니다. 턱을 조심스레 올리고, 양 팔을 엉덩이 밑으로 늘여뜨렸습니다. 목뼈가 옅게 드러나고, 야윈 상반신이 쭉 펴지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듯한 그저 그런 발레복이 굴곡지지 않은 몸에 찰싹 붙어있습니다. 곁을 맴돌 공기마저 멈칫할 것 같은 포즈입니다. 막상 따라하면 오래 있기 힘든, 발레의 기본 자세 중 하나입니다.


   지금의 원료는 청동이지만, 원래는 밀랍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었습니다.


   밀랍인형을 보신 적 있나요. 잘만 하면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게 밀랍 상입니다. 진짜 사람 머리카락, 머리에는 리본, 양 발에는 발레슈즈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보는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줄 수밖에 없던, 드가의 대표작입니다.


   "이 따위 상은 미술관이 아닌 인류 박물관에나 있어야 하는 것."
   "한 소녀의 슬픔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묘사하는가. 더 이상 예술이 추락할 곳이 없다."


   드가가 인상주의 전시회 때 낸 조각상은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습니다.


   이 작고 여윈 소녀상으로 인해 이같은 온갖 욕지거리를 듣고는 손을 놔버렸지요.




   드가가 여성혐오자였다고 주장하는 이는, 그가 탐미주의자에 불과했다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드가는 '발레리나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많은 무희들을 예술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런데도 단지 그들이 품고 있는 곡선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당시 남성들도 고개를 돌릴만큼 여성혐오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하죠.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피에르 조르주 잔니오(1848~1934)는 "드가는 자신의 모델이 된 어린 무용수들을 '작은 원숭이 소녀들'이라고 했다. 또 '내가 여성을 동물로 취급할 때가 많은 게 사실이지'라고 말을 뱉곤 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 시대의 귀족 아닌 평범한 여성들이 가장 선호한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으로는 연예인과 같은 무희였습니다. 여성들에게 있어 요즘은 공무원 붐이라면 그땐 가희 무희 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잘만 되면 동년배의 평범한 남성보다도 2~3배 넘는 월급을 받았지요. 예쁠수록 더 화제가 됐고, 이에 따라 유명 화가들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에드가 드가, 더 스타.

   그런데, 드가가 무희들을 그린 그림 몇 점을 유심히 본 적이 있을까요.


   분명 모델까지 설 정도면 대단한 미모를 떨쳤을 터인데, 종이 속 무희의 얼굴은 미묘히 흐트러진 경우가 상당수입니다. 드가는 당시 최고의 데생 실력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악감정이 있었기에, 그가 굳이 무희들을 이렇게 그렸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드가가 모델 일을 해준 무희들을 꽤나 괴롭혔다는 주장은 요즘 들어서도 속속 거론되고 있습니다.


   드가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를 만들 때도 모델이 된 마리 반 괴템을 지독히 괴롭혔다고 합니다. 완성도를 높이고자 매일 몇 시간씩 지금 형상과 같은 뒤틀린 발레 포즈를 강요했다는 설입니다. 드가는 그렇게 마리를 괴롭히며 조각상을 만든 후에는 그녀를 사실상 쫓아내버립니다. 그녀는요. 발레 리허설에 많이 빠졌다는 것(모델 일을 하다가!) 때문에 원래 속한 발레단에서 퇴출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미국 미술정보사이트 아트디(Artsy)의 미술사 편집자 줄리아 월코프는 최근 '드가의 무희 이면에 숨은 추악한 진실'이란 글을 올렸습니다. 월코프는 드가가 파스텔화를 선택한 것 또한 그저 무희들의 동작을 빨리 포착하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굳이 파스텔화를 고집한 것 또한 무희들의 '애잔함'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구나…. 드가의 팬들은 또 한 번 실망하고 말았지요.




   그래도, 드가가 여성 존중자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여전히 많습니다. 어쨌든, 드가만큼 당시 무희들의 비루한 삶을 고발한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드가가 모델로 종종 데려온 '작은 생쥐들'(petits rats) 소속 무희들은 주 6일 이상 발레 연습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성공이 보장됐을까요. 열에 아홉은 병들고, 찌들고, 괴로움에 빠져 사라집니다. 드가가 그린 무희들의 얼굴을 보면 묘하게 흩뜨려 그린 듯한 느낌이 올 때가 있다고 했지요. 드가의 옹호자들은 그가 남다른 애정이 있어 이런 그림을 남겼다고 말합니다. 푸념하고, 땀 흘리고, 때론 근육이 끊어지고, 또 가끔은 발가락에서 피가 나는 그런 현실 속 여성상을 고발하기 위해 일부러 이랬다는 것입니다.


에드가 드가, 무대 위에서의 연습.

   당시 프랑스 파리의 극장 안 무희들이 몸을 푸는 대기실은 필요 이상으로 컸습니다.


   돈 많은 귀족들이 무희들의 몸을 감상하는 사교클럽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입니다. 


   말이 그렇지요. 실상은 귀족들이 이들을 대상으로 매춘 거래를 한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드가의 무희 그림을 보면 상당수에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성이 나옵니다. 십중팔구 봄(春)을 사러 온 사람들입니다. 드가는 이를 통해 공공연한 성적 도구로 쓰인 여성들의 현실을 화폭에 옮긴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이 시대의 타락한 남성, 또 그들에게 희생되던 여성의 안타까움을 전달하기 위한 차원에서였다….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연습에 몰두하는 그녀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즐거움이 밀려오네
   아직 빈민가의 흔적이 있는 그녀


   65세 무렵 드가가 쓴 시 '어린 무용수'입니다.


   그녀의 '가치'란 한줄기 선을 말하는 걸까요, 그 시대상을 고발할 수 있는 형상을 말하는 걸까요. '빈민가의 흔적'은 혐오에 다른 말일까요, 애처로움에 따른 말일까요. 이런 해석, 저런 해석 모두 적용될 법하네요.


   드가가 좋든 싫든, 여성 그림만 1500점 이상을 남긴 이유는 왜일까요. 성경, 정물 등 흔한 소재들을 놓고 눈이 멀 정도로 여성에만 온 인생을 쏟은 까닭은요.


      드가가 여성에 대한 어떤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이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발전시킨 것 또한 분명해보입니다. 


   드가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건 다름 아닌 어머니였습니다. 드가가 여성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할 기회를 준 이 또한 어머니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아버지를 두고 다른 이를 사랑했습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아버지의 친형제. 그는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일탈이 없었다면 가정의 평화는 꽤나 보장됐겠지요. 


에드가 드가의 초상.

   드가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틈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은 1886년에는 미국 뉴욕, 1905년에는 영국 런던에서 인상주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됐습니다. 그는 모두 여덟 차례 열린 인상주의 전시회 중 일곱 번을 참여했지만, 자신의 양식과 인상주의 미술 사이에는 거리를 두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사실주의로 분류되는 일도 원치 않았습니다. 아예 말년에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사실주의 그림을 보곤 "차라리 사진을 찍어!"라고 악평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학계에선 그래도 사실주의 화가로 분류하는 편이지만, 결벽증이 있는 이들 사이에선 '차라리 무덤에 대고 물어보고 싶다'는 말도 나오는 중입니다.


   그는 그냥 자신이 본대로, 느낀대로 그렸습니다. 무슨 의도로 여성들을 그렇게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현 시대에선 모두 긴장감이 서린 위대한 작품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자발적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던 그는 83살, 파리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동료도 없고, 제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의 숱한 화가들은 그의 그림을 참고했고, 지금도 중요한 교보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전 09화 '불멸'의 사랑 vs '불 붙은' 사랑?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내 생애 첫 미술책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