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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Sep 09. 2020

못생기고 거칠어도 글은 아름다웠다오

<르네상스 특집 2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소네트'>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평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굶주리는 이가
   만난 맛있는 음식과도 같지요   
   당신이 웃을 때, 길에서 인사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당신이 말을 걸 때   
   나는 얼굴을 붉히지만   
   모든 괴로움은 가라앉습니다


   달콤하죠. 청춘의 풋사랑을 노래하는 듯합니다. 짧은 문장인데,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거듭 고쳐 썼을 것 같은 정성이 보입니다. 혹시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군지 아실까요. 까칠한 천재, 괴팍함의 대명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입니다.




   천재. 하지만 추남, 외곬수, 걸걸한 입, 구부정한 낭인.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칭해지는 미켈란젤로가 갖는 인상입니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피에타와 다비드 상…. 미켈란젤로는 분명 천재를 뛰어넘는 천재였습니다. 다만 그는 인기 있는 유명인은 아니었습니다. 되레 슬금슬금 피해야 할 싸움꾼이었죠. 그 시대에 어떻게 90살까지 살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지경입니다.


   좋게 보면 당당함, 나쁘게 보면 굉장한 오만함을 가진 미켈란젤로의 꼬장꼬장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는 '전쟁 교황' 율리오 2세에게 대든 일입니다. 당시 교황은 지금처럼 실권이 없는 게 아닌, 사실상 왕의 권력을 가진 절대자였습니다. 싸움의 원인은 현재 바티칸시국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입니다. 교황이 묻습니다. 언제 그림이 완성될 것 같은가. 미켈란젤로가 말합니다. 제가 끝낼 수 있을 때요. 교황은 어이가 없어 눈을 추켜 뜹니다. 요즘 시대에서 손가락 두 개로 이마를 밀어내듯, 지팡이로 이 오만한 천재의 어깨를 툭툭 칩니다. 미켈란젤로는요? 성질이 나 짐을 싸들고는 도시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성질이 난 교황은 기적과 같은 인내심을 갖고 참습니다. 그런 천재성을 갖는 이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가니메데 납치


   시인이 되는 가장 쉬운 길은 사랑이라고 하던가요.


   미켈란젤로도 사랑을 합니다. 그는 학문에 몰두하는 예쁜 청년들에게 매혹을 당하곤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시기에서 동성애는 공공연했습니다. 이 사상 자체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 만큼, 당시 횡행했던 동성애도 받아들이기가 쉬웠겠죠. 1532년, 57살의 미켈란젤로는 무려 35살이나 어린 토마스 데 카발리에리란 청년을 만나고, 진심 어린 사랑을 합니다. 그가 여태 만난 청년들은 하나 같이 건방졌습니다. 그의 돈을 보고 다가간 청년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달랐습니다. 탄탄한 몸, 배운 티가 나는 기품, 예의 바른 자세. 귀족 출신이라 돈 걱정도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이 청년이 예술에 미쳐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 작품에요. 미켈란젤로는 매일 아침 사랑에 젖은 시인으로 눈을 뜹니다. 낯뜨거울 만큼 찬사가 가득한 시를 씁니다.


   내가 너만을 사랑한다고, 내 신사여
   흥분하지 말아다오
   너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신에 사로잡힌다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것
   네 미모에서 배우는 것
   인간의 정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알려고 하지도 말아야 하네 
   식음을 잊는 것
   그대 이름을 잊는 것보다 훨씬 쉬워
   음식은 단지 우리 육신을 지탱할 뿐이나
   그대 이름은 내 육신과 정신
   모두를 부양한다오


   미켈란젤로는 시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그러기엔 너무 경외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독수리 모습의 제우스, 토마스를 예쁜 목동인 가니메데로 묘사한 그림을 그립니다. 토마스를 '최후의 심판'에서 제우스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사랑에 대한 시만 쓴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년으로 갈수록 종교에 관한 시를 쓰는 일도 즐깁니다. 이 괴팍한 사람이 종교를 놓고 시를 쓴 까닭은 그가 '아름다움을 통해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르친 신플라톤주의 신봉자였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그의 평생 소원은 신과의 대면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시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아름다움이 나로 하여금 하늘을 향하게 하노라
   (아름다움 외에는 나를 사로잡는 게 이 세상에 없도다)
   나는 살아있는 몸으로 영들의 전당에 드노라
   죽어야만 하는 인간에게 내려지는 얼마나 드문 축복이랴.
   (중략)
   아름다움에 취한 내 마음을 움직이는
   그 숱한 상념들을 형태로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못하면,
   신의 동산으로 가는 길을 비추는 광채가
   그 눈에 깃들여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니라.
   그 눈의 광채를 받아 나의 가슴이 타오르면
   내 고귀한 불꽃 속에는
   천국을 지배하는 온화한 기쁨이 아름답게 투영되노라.


   아름다움을 찾고, 이를 통해 신을 만나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이는 시인 막스 뮐러(1823~1900)가 쓴 소설 《독일인의 사랑》(1866)에 소개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순수한 소년, 난치병을 앓는 투명한 소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을 엮어주는 끈이 미켈란젤로의 시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런가 하면, 


   그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을 보았을 때
   육신은 땅에 있었으나 지옥을 보았네
   또한 공의로움과 선함을 동시에
   그는 하느님을 보기 위해 살았지   
   (중략)
   이것은 찬란한 별, 영롱한 색과 함께
   내가 자라난 곳은 과분하게 빛난 곳
   그러나 이 세상은 그에게 혹독했다네
   주님만이 그를 아름답게 만드셨네
   (중략)
   내가 만약 그였다면!
   그토록 큰 행운을 타고났지만
   선한 사람은 추방의 고통을 받았으니
   나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그와 함께 나아가리.


   이런 시도 썼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계승자,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신곡》 저자)를 기리면서 쓴 시였습니다.




   시를 읽다보면, 이런 여린 감수성을 가진 이가 과연 희대의 기인이기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 미켈란젤로의 성향을 놓고는 지금도 학계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합니다. 되레 통념과는 달리 사람을 싫어하지 않고, 고립을 자처한 자도 아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특히 시와 노래, 농담을 즐겼다는 설도 이야기도 나옵니다. 오직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만은 아니었던 것일까요. 미켈란젤로는 평생 스스로를 조각가로만 칭했습니다. 자신보다 나은 조각가가 없다는 자부심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 그는 현재 알려진 것만 300편이 넘는 시를 썼는데도, 자신을 결코 시인으로 소개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시에 대해 늘 겸손한 자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 기나긴 인생 여정은 폭풍 치는 바다를 지나
   금방 부서질 것 같은 배에 기대
   지난날 모든 행적을 쓴 장부를 꺼내줘야 하는
   모든 사람이 거쳐 가는 항구에 도달했다네
   예술을 우상으로, 나의 왕으로 모신
   저 모호하고 거대한, 열렬했던 환상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네
   나를 유혹하고 괴롭혔던 욕망은 헛것이었네
   옛날에는 그토록 달콤했던 사랑의 꿈들
   지금은 어떻게 변했나
   두개의 죽음이 내게 다가오네
   하나의 죽음은 확실하고
   또 다른 죽음이 나를 놀라게 하네
   어떤 그림이나 조각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네
   이제 내 영혼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껴안기 위해
   팔을 벌린 성스러운 사랑을 향해 간다네


   미켈란젤로가 죽기 10년 전에 쓴 시라고 합니다. 


   겸손, 자애는 이 안에서도 느껴집니다. 예술만을 최고로 생각한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느껴집니다. 신 앞에서 인생사가 쓰인 장부를 내밀 장면을 상상하는 듯합니다. 신의 사랑으로 영혼을 위로받고 싶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이 시를 쓸 시점부터 "대리석에서 천사를 보고 있다"는 말을 종종 했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초상.


   미켈란젤로의 시가 세상 빛을 보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1632년, 그가 죽은 후 60년 뒤인 어느 날, 미켈란젤로의 조카 손자가 시들이 모인 책자를 우연히 발견합니다. 그는 곧 문장 하나 하나가 아름답기 그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시 상당수가 남성에게 바쳐졌다는 점을 알고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르네상스의 열병은 옅어지던 때였기에, 지금 이 시를 공개하면 가문 자체가 구설수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조카 손자는 고민합니다. 그렇다고 서랍 속에 넣어두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결국 시 속 남성형 대명사를 모두 여성형으로 바꿉니다. 진실은 그로부터 약 250여년이 흐른 19세기 말에서야 공개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생은 평생 순탄치 않았지요.


   아버지는 그가 예술가의 길을 걷는 것을 때리고, 조롱하며 반대했습니다. 미켈란젤로에겐 남동생 3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버지 이상의 망나니여서 사건사고만 몰고 다녔습니다. 가장 아낀 동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 수시로 병을 앓았습니다. 일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지요. 그에게 평생 일을 맡긴 교황 율리오 2세(1443~1513)는 항상 돈을 제때 주지 않았지요. 싫은 일을 억지로 시켰고, 작품이 그런데도 자기 마음대로 안 나오면 폭언을 쏟아붓기 일쑤였습니다.


   그가 시에 더욱 몰두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시를 보면 모든 더러운 일은 뒤에 놓고, 오직 아름다운 단어를 찾는 데만 몰두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옅은 미소를 짓고, 때로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짓고서요.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난 이 일을 피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 분에 대한 사랑으로 봉사하며
   그분에게 나의 모든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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