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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욱 Sep 30. 2023

내 영혼의 히어로. 아버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 조상들은 왜 추석을 이와 같이 표현했을까? 문맥으로 보면 추석을 상당히 좋아하고 기다렸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아마도, 먹고살기 힘들었던 1960년-1970년 보릿고개 시절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작물을 수확하는 추석에는 먹을거리가 풍요롭게 준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1년 내내 논농사, 밭농사, 자식농사로 몸과 마음은 힘들어도 추석명절은 넉넉하고 여유가 있으며 이웃과 나눔이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요즘 추석은 예전 명절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가는 듯해서 못내 아쉽다.


돌이켜보니 내 기억 속 추석은 추억 가득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20세 약관의 나이에 수원에 소재한 중견기업 전기회사(금호전기)에 입사하셨고 35년을 성실하게 일하시고 지금의 내 나이 55세에 정년퇴직하셨다. 추석 전날이면 아버지는 퇴근하며 간식거리 등을 사서 집에 일찍 들어오셨다. 그리고 잠바 주머니에서 누런 봉투를 어머니에게 건네주셨다. 얼핏 보니 봉투에는 글씨로 '상여금'이라 쓰여있었고, 어머니는 봉투 속 돈을 세며 금세 얼굴이 밝아지셨다. 40년 전 일인데도 초등학교 시절 그때의 그 순간을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신감, 어머니의 행복감을 아들이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추석 즈음해서는 반찬이 평소와 달랐고,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수원 최대 전통시장인 남문시장으로 나가셨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보세상품'이라는 상호의 가계에서 매년 추석 옷 한벌씩을 사주셨으며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추석음식을 구입하셨다. 당시 초등학생 동심으로는 추석은 먹을 거 많고 좋은 옷 입는 정말 헹복한 날이었다.


추석당일이 되면 새벽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어제저녁 어머니가 사주신 옷을 차려입고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 4명이 선물보따리 하나 들고 수원역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1970년대는 자가용은 언감생심, 이동수단은 무조건 버스였다. 수원역에서 성북행 전철을 타고 1시간 30분가량 이동하고, 성북역에서 하차 후 광운대학교 경유하여 장위동 큰아버지 댁까지 또 20분을 걸었다. 큰아버지 댁에 도착하면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30분 간격으로 마포 고모님이 도착하시고 방 2칸 장위동 큰 집은 앉을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로 빽빽했다. 큰어머니, 어머니, 형수들은 제사음식 준비하고, 큰 아버지는 지방 쓰며, 남자들은 밤을 깎고 집 주변 환경을 정돈하였다.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막내인 나와 동생은 동네 문방구에 쪼르르 달려가서 추석을 맞아 새로 들어온 신상품들을 쇼핑하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대동소이한 추석풍경이었다. 여기까지는 행복한 추석명절 풍경이었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오전에 차례를 마치면 가족들은 친할머니 산소가 있는 의왕시 청계동 천주교 공원묘지(하우현 성당 인근)로 성묘를 떠난다. 당시 서울에서 안양까지 지하철을 이용하고 안양시 인덕원에서 버스를 타고 의왕 산소입구까지 버스로 이동한다. 추석성묘객들과 제수용품, 각종 선물 등으로 버스는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였다. 산소입구에서 묘지까지는 대중교통이 없어 지나가는 용달차를 얻어 타거나 걸어서 이동한다. 초죽음이 될 지경이다. 가까스로 산소에 도착하여 제사를 준비한다. 장위동 큰 집에서 제사음식을 그대로 산소까지 캐리 한 것이다. 후손들 그 정성은 지금 생각해도 조상님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추석의 비극은 항상 그 이후 발생한다. 제사를 마치고 가족들은 평지에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둘러앉는다.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들을 배불리 먹으며 음복을 안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큰아버지가 술병을 들며 고모, 아버지, 사촌형들에게 한잔 따라주신다. 아버지는 당시 폐결핵 있어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큰 아버지술 권함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잔 두 잔 정종을 마시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한다. 일순배 돌아가며 마침내 얼큰하게 취하신 큰아버지, 고모가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기 시작한다. 마누라에게 잡혀 산다느니, 남자답지 못한다느니..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핀잔받는 상황이 거북했지만 그 자리에서 큰아버지와 고모랑 맞서 싸울 수 있는 대학생 조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사촌형들은 가방끈이 짧고 직장생활을 하는데 나는 대학을 다니는 있다는 것이 큰아버지와 고모의 시선에서는 열등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급기야 어머니가 나 대신 가족의 전쟁에 뛰어드신다. "아버지가 못 배웠는데 자식도 못 배우면 어떡해요? 자식이라도 잘 가르쳐야죠." 논쟁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확전 되고 추석날 성묘는 한바탕 전쟁으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였다.


큰아버지와 고모 연합군과 어머니 도고다이로 싸우는 전쟁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성적인 아버지는 술만 들이키시고 만취한 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건 내 몫이었다. 화가 안 풀리셨는지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대판 싸우시고 때로는 손찌검까지 하셨다. 아버지가 화가 나신 것은 이해하지만 화풀이 대상이 큰아버지와 고모가 아닌 어머니로 향하는 것이 자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거칠게 대들었고 아버지는 나를 때리지는 않으셨지만 물건을 던지는 등 화를 참지 못하셨다. 결혼하기 이전까지 추석과 설날 등 명절풍경은 항상 이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전반전 맑음, 후반전 흐림. ISTJ 내성적인 내 성격이 ENTP 외향적으로 변한 것은 아버지의 역할도 한 몫하였으리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은 장위동 큰아버지, 마포 고모, 아버지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2020년 8월 신장 투석 등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후 4개월 투병 끝에 2021년 정월 초하루 새벽 5시 천국으로 떠나셨다. 아버지가 투병 중이던 2020년 8월은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병원입원 및 요양병원 가족면회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필요한 물품과 편지를 병원관계자에게 전달하는 것 외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핸드폰 통화는 가능했으나 요양병원 입원 이후 아버지는 본인이 처한 상황에 좌절한 탓인지 정신을 놓으셨다. 입원 이후 천국 가시기 전까지 3차례 영상통화를 했지만 아버지 생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없었다.


2020년 12월 31일 종무식 준비로 바쁜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 임종이 가까워오니 면회를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올게 왔구나!. 엄동설한 날씨는 매섭게 춥고, 떨리는 손으로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핸들을 맡기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관계자 안내로 아버지 계신 병실로 들어갔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 모습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터졌다. 의사는 아직 의식이 있으니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한다. 아버지 옆에 다가앉아 아버지 귀에 나지막이 고백했다. "아버지 죄송해요. 너무 늦게 와서.. 아버지 사랑해요. 우리 천국에서 만나요". 아버지는 아무 반응이 없으셨다. 의사는 들으셨을 거라 위로한다. 아버지는 임종실로 옮겨지고 가족들과 제대로 된 이사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2021년 1월 1일 새벽 5시. 하나님 계시는 천국으로 홀연히 떠나셨다. 삶과 죽음의 순간이 이리도 허망할 줄이야?


2021년 1월 1일 아버지가 천국 떠나시고 어느덧 5번째 명절을 맞이한다. 솔직히 지난 2년간 명절이 두려웠다. 특별히 명절이라 준비하는 것은 없지만 심리적 부담감, 아버지를 외롭게 떠나보내드린 죄책감으로 그냥 명절을 회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아계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추석당일 어머님 댁을 방문하여 동생네 식구랑 아침식사를 같이한다. 어머니와 며느리 두명이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하실 음식들로 정성스럽게 준비하였다. 아버지가 게셨더라면 이거는 맛이 어떻고, 저거는 맛이 어떻고 말씀이 있으실 텐데... 침묵으로 그냥 맛있게 음식을 먹을 뿐이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불현듯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침 밥상을 물리고 용인 수목장에 잠들어계시는 아버지에게 가족이 총출동한다. 예전 큰 집에서 제사를 지냈더라면 성대하게 제사상을 준비하였을 텐데 아버지는 천국가시기 전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매주 일요일 큰아들이랑 교회출석하는 것이 삶의 큰 기쁨이었고 천국 가시기 2년 전 세례를 받으셨다. 그래서 아버지 기일에는 기독교 예식인 추도예배로 추모하고 음식은 준비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아직까지 섭섭한 부분은 있지만 아버지 자주 찾아뵙고 진실되게 추모하는 마음 다하는 것이 아버지도 좋아하실 것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TV를 시청하는데 TV 인기드라마 '전원일기' 하이라이트 명장면이 나온다. 양촌리 김 회장 네 전화기 들어온 날. 어머니 역할의 김혜자는 새벽 잠자리 이불속에서 조용히 전화기를 든다. 그리고 나지막이 하늘나라 친정어머니에게 속삭인다.


"여보세요. 우리 어머니 좀 바꿔주세요. 은심이가 꼭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깜깜한 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추운 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엄니 계신 데가."


김혜자의 명연기에 가슴속 꽁꽁 숨겨두었던 슬픔의 쓰나미가 거세게 몰아친다. 지금 내 마음이 저런데, 김혜자 씨는 30년 전에 저 슬픔을 어찌 리얼하게 표현할까? 멍하니 TV만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55세 이제 나도 예전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35년 다니던 직장을 정년퇴직하시고 나는 27세,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갈 채비를 하는 시기였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 내가 고민하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5세 정년퇴직 이후 아버지의 외로움, 쓸쓸함, 허망함... 이런 감정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 아들이 지금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때의 아버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부질없는 짓이지만 추석명절이어서 아버지가 너무 너무 보고 싶다.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많은데, 꿈에서라도 만나 소주 한잔 따라드리고 속깊은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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