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우리 새끼", "돌싱포맨", "나 혼자 산다", "우리 이혼했어요" 등 현재 방송에서 많은 가족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 취지와는 달리 가족공동체 활성화보다는 가족공동체 해체를 조장하는 듯한 자극적 소재 때문에 요즘은 가족예능 시청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가족예능의 홍수 속에서 보석 같은 프로그램 하나를 발견했다. "아빠하고 나하고"라는 프로그램이다. 세상 누구보다 가깝지만 때로는 세상 누구보다 멀게만 느껴지는 아버지와 아들, 딸 사이의 애증관계를 가정친화적으로 회복시키려는 프로그램이다. 특히, 영화 도가니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장광과 그의 아들 장영 부자지간 리얼스토리가 현재 나와 아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매주 본방송을 시청하고 유튜브 재방도 놓치지 않고 있다.
방송스토리는 1,000만 배우 장광과 무명배우인 아들 장영의 갈등구조를 극대화하고 부자지간 갈등의 원인을 시청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방송에서 표현되는 아들 장영이 몹시 못마땅했다. 수려한 외모지만 37세의 나이에 직장도 없이, 알바로 생계를 유지하고, 부모님 집에서 캥거루족 생활하며 배우로 성공하기를 끔 꾸지만, 대학원에서는 직업과는 무관한 심리학을 전공하는 엉뚱한 그의 일상 속 모습을 전통적 가족문화에 익숙한 내가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아버지 장광은 딸에게는 다정다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아들에게는 유년시절부터 피아노레슨을 강요하며 아들의 미래를 본인이 설계하고 리드하는 모습에서 영화 도가니에서 그가 열연한 교장선생님 환상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과도한 관심과 강요는 결국 아들에게 마음속 상처를 남겼고 부자는 가정이라는 한 공간에서 가족의 이름으로 생활하지만 결코 가족으로 보기 어려운 이질적 거리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방송을 유심히 보며 지금 우리 집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장광이 보여주는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닌지? 아들 장영의 아픔을 보며 울 아들은 어떠한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을 이어가던 중 방송에서 장광 부자가 경기도 가평군 지인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아버지와 성인 아들 남자 두 명이 떠나는 여행이라... 어릴 때야 학교에서 '체험학습' 명목으로 부자지간에 얼마든지 여행을 할 수 있지만 75세 아버지와 37세 아들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은 시청자 입장에서도 불편함과 어색함이 가득한 순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버지와 아들이 떠난 여행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아버지에게 철옹성처럼 견고하던 아들이 친구 어머니에게는 봄꽃처럼 따스하고 화사한 기운이 넘쳤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명배우로서 겪었던 아픔과 극한의 알바를 하면서도 배우로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아들의 집념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들은 IMF 이후 아버지가 성우를 실직하고 화물차를 운전하며 영화 도가니로 재기하면서 현재 가정을 유지하기까지 아버지의 수고로움에 진정성 있는 감사를 표현한다. 왈칵! 눈물이 쏜아졌다. 소리 내지는 못하고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잠시 멍하니 TV만 바라보았다. 이 방송의 클라이맥스였다.
(아들과 둘이 떠나는 1박 2일 경남 남해 캠핑여행을 결정하다)
그래 결심했어! 개그맨 이휘재가 예능방송에서 보여 준 시그니쳐 행동처럼 방송이 끝나자마자 한 손을 높이 들고 결심했다. 아들과 둘이 여행을 떠나는 거야. 지금까지 가족 4명이 떠나는 여행은 많았지만 아들과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은 한 번도 없었다. 2023년에는 베트남 다낭, 2024년 7월에는 필리핀 세부, 그 밖에도 1년에 2-3회는 국내외 콘도에서 가족여행을 하는 터라 여행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들과 둘이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다. 망설여졌다. 아들이 거절하면 어쩌지? 아내에게 프러포즈할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카톡이다. 남자끼리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쑥스럽고 먼저 아들에게 톡을 날렸다. 그런데 아들이 보고도 답이 없다. 아들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을 주자". 그래도 답이 없다. 며칠 후 퇴근해서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아빠 휴가 2일 쓸건대 아빠랑 1박 2일 여행 갈래?" 아들의 대답은 OK였다. 수일간 정성스럽게 작성한 보고서를 도지사에게 결재받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다. 아빠의 호의를 쿨하게 받아들여 준 아들이 고마웠다. 돌이켜보면 아들은 평소 의사결정에 매우 신중하다. 때로는 고구마 먹고 물을 안 먹을 때의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아들의 동의로 아빠와 아들의 1박 2일 브로맨스 여행은 확정되었다. 이제부터 준비해야 할 것은 오롯이 아빠 몫이다. MBTI가 ISTJ(청렴결백형 논리주의자)인 아빠는 여행일정은 시간, 장소, 숙소, 음식, 여정이 타임스케쥴대로 움직여야 한다. 솔직히 여행보다는 이 과정이 큰 즐거움이긴 하지만 때로는 많은 시간과 노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들과 둘이 떠나는 여행의 기대감에 이 같은 수고로움은 장에물이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의 목적지이다. 강원도 고성, 속초, 정동진 등 동해는 자주 갔고, 만리포, 태안, 변산 등 서해도 자주 갔다. 그래도 아들에게 목적지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에티켓이다. 아들은 남해바다를 보고 싶다고 한다. 이심전심인가? 부자지간 텔레파시가 통하였다. 그렇케 경남 남해, 사천시가 목적지로 결정되었다.
좋아. 목적지 결정되었고 다음은 숙소이다. 여자들이 동행하면 숙소결정에 신중하지만 남자끼리 가는 여행이라 호텔, 펜션 등 고급스러움보다는 자연 속 야생이 살아있는 캠핑을 즐기고 싶었다. 아들에게 물어보니 좋다고 한다. 솔직히 캠핑장비도 없고 캠핑 감성만 맛보고 싶은 터라 모든 것이 구비된 글램핑장을 찾기 시작한다. 경남 남해군 바다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힐링아일랜드 캠핑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격은 펜션 1박 가격과 동일하지만 냉방 등 시설이 완벽하고 지연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저 없이 캠핑장을 목적지로 결정하였다.
캠핑장 도착하자 집에서 아내가 챙겨 준 음식을 냉장고에 풀어놓는다. 한숨 돌리고 아들과 주변을 산책한다. 너무 더운 날씨라 오래 걷지는 못하고 저녁에 먹을 음식을 위해 인근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른다. 아들과 둘이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고 캠핑장으로 돌아온다. 작렬하던 태양도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저녁시간이 되자 캠핑장 하이라이트 바비큐타임이다. 불 피우는 것을 못해 주인에게 20,000원 지불하나 고기 구워 먹을 수 있게 세팅해준다. 돈 만 있으면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이다. 아들이 웃통 벗고 직접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이다. 어린아이 같았던 아들이 남자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어 떡볶이 어묵탕도 끓이고 반찬을 세팅하니 제법 풍성한 만찬이다. 이 멋진 장소에서 이 좋은 음식에 사랑하는 아들과 맥주 한잔 하며 속 깊은 이야기 하고 싶은데 아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종교적 신념이라 아버지로서 강요할 사항은 아니다.
저녁 10시가 되자 아들이 할 일이 있다고 아빠 먼저 자라고 한다. 알았다고 대답하며 침대에 누워 아들이 무엇하나 지켜보는데 노트북에 무슨 글을 쓰는 모양이다. 아들은 현재 수도권 소재 H대학교 3학년 학보사 기자로 일하고 있다. 아빠 닮아 재수하여 1년 늦게 입학하더니 2학년부터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아들이 학보에 게재한 글을 보며 사회현상에 관심이 많구나! 이것도 부전자전인가?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들의 고민을 이해하다)
아들은 대학입학 및 진로문제로 상당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2002년생 23세 남자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경험칙상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구체적 직업으로는 아빠처럼 공무원이 되길 원했고 대학전공도 법학, 행정학을 선택하길 원했다. 그러나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올인하더니 전공을 '사회학'으로 결정하였다. 아버지로서는 탐탁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아들의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도 뒤늦게 인지했는지 3학년부터는 '국제관계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였다. 전공에, 부전공에 대학학보사 기자까지 학기 중 아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원에서 경남 남해로 떠나는 5시간, 남해에서 수원으로 올라오는 5시간 차 안에서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들은 중앙부처에서 외교공무원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아들은 이상을 바라보고 아버지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상이몽의 순간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계획에 구체적 Action Plan을 포함한 현실적 조언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외교라는 업무의 전문성과 특수성, 외국어 실력 등 자격요건, 해외복무 등 아들의 꿈만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을 잘 알기에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4년째 벌이는 논쟁이지만 아들도 서서히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아들의 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부족함이 답답할 뿐이다. 해외유학도 보내고, 좋은 학습환경을 제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의 경제적 여건으로 아들의 꿈을 지원하지 못하는 아픔을 자책할 뿐이다. 더욱이 사회복무요원 판정 이후 2년째 소집통지가 없는 상황은 아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병역문제를 해결해야 자신의 로드맵을 실천할 수 있는데 현재의상황이 아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음에 큰 돌 하나가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 계획 없이 허송세월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들은 남모르게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답을 제시할 능력도 방법도 없다. 그저 아들이 걸어가는 길에 함께 동행하며 아들의 계획을 응원하고 공감하며 지지하는 것 밖에는..
1박 2일 여행동안 아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아들은 나름대로 현실과 맞서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빠하고 나하고" 프로그램에서 아들 장영의 모습을 비판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대로 아들이 삻아야만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닐진대, 아버지가 아들의 미래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대신 어색하고 서먹한 부자지간의 거리는 한 뼘은 가까워진 것이 이번 아들과 1박2일 여행의 기장 큰 성과이자 보람이다.
아들이 이 글을 읽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 글을 읽을 날을 기대하며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주성아! 아빠는 네가 가는 길 옆에서 너를 항상 응원할게.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흥얼거리며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 You Raise me up. 누군가를 향한 아들의 고백으로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온다.
2024년 7월 아빠와 아들의 1박 2일 캠핑. 56년 인생에서 멋진 추억의 한 페이지로 소중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