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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림 Sep 13. 2022

서글프고도 다정한 나의 구월

나의 아빠는 암이었다.

암을 선고받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아빠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팔월 한낮의 뜨거운 해가 내리쬐던 어느 날, 대학생이었던 나는 방학중이었고 마루에 놓인 컴퓨터로 웹서핑을 하며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방문할 사람이 없는 낮시간,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아빠가 집으로 들어왔다. 가까운 곳에 사무실이 있던 아빠가 잠시 집에 들른 거라 생각해 무슨 일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는데 아빠는 생각지 못한 답을 내뱉었다.

본인이 암이란다. 나의 아빠가 암이라니. 그리고 누가 그걸 그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하는가?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소파에 앉아 눈물이 맺힌 채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앉아있는 아빠에게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그날 밤 엄마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이미 십 년이 지난 일이었고 나는 무섭고 힘들었던 기억은 스스로 잘 지워내는 편이기에 자세한 것들이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당시의 일기장들도 모두 버렸고 그저 내 머릿속 한편에 남아있는 당시의 기억을 끄집어 내 글을 이어 본다. 아마도 당시 나는 너무나 무서웠고 힘들었었나 보다.)

아빠는 이미 위암 4기였고 진단받은 병원에서 1년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세상에 내 아빠가 시한부라니.

그 당시 아마도 나는 당장의 아빠가 걱정되기보다 암환자의 가족으로, 혹은 혹시나 잘못되어 아빠 없이 살아갈 나 자신을 더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고군분투 암 투병이 시작되었다. 의사는 고작 1년을 선언했지만 우리 가족 중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암으로 힘든 긴긴날들을 보내고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기적 같은 날 우리 가족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고 기쁨의 파티를 했다. 그런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어딘가에 숨어있던 암 새끼가 튀어나와 이전보다 더 빠르게 전이되며 아빠를 괴롭혔다.

의사의 진단을 믿지 않은 우리에게 보란 듯이 아빠는 암 선고를 받은 후 정말 일 년 하고도 딱 한 달을 살고 돌아가셨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해 첫 직장을 다닐 때였고 내 동생은 고작 중학교 2학년이었다. 이제는 오롯이 남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아빠가 살아계실 때 함께 살던 집은 추억보다 아픔이 되어 도망치듯 그 집에서 이사를 했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아픔을 보듬으며 살아냈다.

그 아픔을 이겨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나는 나대로 견뎌냈을 뿐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구월은 내게 아픔의 달이 되었고 그 이후 구월이 돌아올 때쯤이면 귀신같이 우울해졌다.

하지만 카페를 오픈하고 어느 상황에서든 웃으며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 무엇도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카페 솔림의 대표이니까. 행여나 손님들에게 나의 우울이 번질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카페에 자주 들러주시는 아저씨가 계셨다. 감사하게도 늘 여러 잔을 구매하셨고 자주 오가며 조금 친해진 후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가 다니는 성당에 다니신다는 것, 여러 잔 구매한 음료는 성당 모임으로 가져가신다는 것, 그리고 매번 받아가는 쿠폰은 본인 딸내미를 주신다는 것 등 사소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와 똑 닮은 내 또래의 따님분이 어머니와 함께 오셔서 쿠폰을 사용하셨다. 정말 많이 닮아서 말씀하지 않아도 아저씨의 따님분인걸 알고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애써 꾹 참느라 혼났다. 카페를 하며 손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정말 엉뚱한 타이밍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때가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러한 타이밍이었는지 퐁퐁 흘러나올 것만 같은 눈물을 힘주어 참아냈다. 아마도 나에겐 없는 아빠와의 사소한 추억이 부럽고 서글펐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빠와 나는 그렇게 살가운 부녀 사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후회되는 일들이 어찌나 많은지 후회를 만회할 기회 없이 그저 후회로만 남아 나의 구월은 더욱 우울하고 지난날들은 더욱 애틋해지는 것만 같다.

구월이 시작되자마자 이모양인데 기일 당일에는 과연 웃으며 손님을 마주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직장 다니던 때 컴퓨터만 바라보며 일하던 때가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기일에는 매장 영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때에 고맙게도 아르바이트 친구들이 하루를 도맡아 가게를 봐주는 일을 수락했고 가게를 하는 사 년 내내 고작 단 네 번이었지만 아빠의 기일이 정기 휴무날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가게에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고 늘 다짐하지만 그날만큼은 도저히 웃으며 손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흔쾌히 도와준 친구들에게 여전히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구월이면 나의 마음을 돌봐주는 다정한 친구들의 사려 깊은 마음들로 인해 해가 갈수록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 여전히 서글픈 날들이 많지만 이 다정한 마음들을 잊지 말아야지.




사실은 이 글을 처음 브런치에 카페 이야기를 연재할 때부터 쓰고 싶은 글이었다.

그렇지만 어쩐 일인지 용기가 나지 않았고 더 잘 쓰고 싶어 한참을 망설이다 이렇게 올 구월 아빠의 기일이 지나가기 전에 글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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