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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Jun 07. 2020

12년 된 경차를 타는 마음

  요즘 흰색 경차를 탄다. 아내가 결혼 전 부터 타던, 세상에 나온지 10년 하고도 두 해를 더 늙어 온 차다. 의자를 제일 내려도 운전석에 앉으면 헤드룸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해서 전방 시야가 그리 좋진 못하다. 그래도 경차 특유의 가벼움과 재빠른 코너링, 좁은 도로에서의 넉넉함 덕으로 마치 카트 라이딩을 하는 듯한 운전 재미가 쏠쏠하다.



  원래 내 차는 11년식 국산 2000cc 중고 중형차다. 운전자들의 험한 운전으로 과학 5호기라 인터넷 상에서 악명이 자자하며, 그 중에서 최고봉이라는 흰색 차량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소녀감성 운전자인 나로서는 (평균 RPM 1500, 대범한 드라이빙을 즐기는 아내는 나의 운전을 매우 답답해한다.) 그러한 오명을 안고 이 차를 타는 것이 억울할 때도 있다.

  대외적인 인식이 어떻든 그 차는 내게 특별하다. 처음 이 녀석을 마주했던 건 신문광고를 통해서였다. 10여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여전히 종이 신문을 받아볼 때였다. 여러 상을 수상할 정도로 디자인의 명성이 자자했다. 유투브 시승기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한 그때, 종이 신문 전면을 가득 메우는 아름다움에 그저 반해버렸다.

  그로부터 약 5년 후, 학회 차 제주도를 갈 일이 있었다. 의국 선배들을 모시기 위해 무심코 렌트카를 빌리려는 데 그 차가 눈에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빌렸고 비로소 그 핸들을 직접 잡아볼 수 있었다. 비록 내차는 아니었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자연스레 동경하던 차를 운전해 볼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인턴, 레지던트 1년차 생활동안 하루 세끼를 병원에서 먹고 주말을 포함해 가뭄에 콩나듯 외출할 때 말고는 일만하며 생활하다 보니 통장에 돈이 쌓였다. 그 돈으로 월셋집을 빌렸는데 그마저도 돈을 아껴 보겠다고 청산하고 본가로 다시 들어갔다. 보증금이 고스란히 통장에 들어왔다.

  수련병원은 해운대 근처였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30분 이상은 가야 바다가 나왔다. 운전으로는 10여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거기에 해안선을 따라 송정, 일광, 간절곶 같은 아름다운 바다들이 즐비했다. 모두 대중교통이 없거나, 있더라도 꽤 걸리는 거리에 있지만 차로는 금방인 곳이었다. 오프 라도 퇴근을 할 순 있지만 새벽 6시에 출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하루도 없던 시절이었다. 1박2일 여행 따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고, 차가 있다면 밤바다를 겨우 볼 수 있는 여유만이 허락되었다. 문득 통장의 목돈이 생각났다. 차를 사자, 마음먹었다.

  자칭 중고차 전문가라는 의국 1년 선배 형과 사이트를 같이 들여다보며 석 달은 교육을 받았다. 연식, 주행거리, 보험이력... 고려해야 할 것들을 열심히 배웠다. 하나에 꽂히면 안되고 여러차를 알아볼 것과, 특히 카센터에서 차를 들어올려 하부를 필히 확인해야 함을 강조받았다. 그러나 대기업의 이름을 빌린 중고차 사이트에서 클릭해 열람해 보는 차량은 늘 한 차종밖에는 없었다.

  직접 차를 보러 갈 시간이 없어 군침만 흘리던 찰나, 외숙모의 먼 친척이라는 중고차 매매상 분을 소개받았다. 병원 앞까지 친히 몰고 와 주신 4년차 흰색 과학 5호기를 타 보았다. 차를 돌려보내기 싫었다. 그래서 보내지 않았고 그날로 그 녀석은 내 단짝이 되었다. 아직까지 나는 한 번도 내 차의 하부를 본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차를 타고 또 내렸다. 내린 이들 중에는 그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 보지 못한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 녀석만큼은 나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누굴 태워도 불만이 없었고, 누가 떠나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때로 마음이 허해 아무리 먼 곳을 가자 무리한 요구를 해도 그 흔한 고장한번 없이 묵묵히 나를 거기에 데려다 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 너무 좋은 나머지 당직 때 지하주차장에서 운전석을 한껏 뒤로 당기고 종종 차에서 눈을 붙였다. 블루투스를 연결한 스피커로 음악을 틀은 채(그러한 기능이 구현된다는 자체가 어찌나 좋던지) 모로 누워 합성가죽 시트의 서늘하고 진득한 느낌에 볼을 파묻던 그 느낌이 얼마나 좋던지. 물론 그 때의 설렘은 무뎌진지 오래다. 그러나 내 첫 차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늘 고맙고, 애틋하고, 아련하고, 좋다.



  아기가 태어나고 아내가 휴직을 하면서 낮 시간동안의 아이의 이동은 주로 아내가 맡게 되었다. 아내 역시 10여년 이상 함께했던 본인의 차량에 적지 않은 애착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경차에게는 미안하지만 육중한 카시트를 싣기에 그 뒷 자석은 비좁은 감이 있고, 무엇보다 12년이라는 세월을 감내해 온 차량의 내구성과 안전성에 아기를 맡기긴 힘들었다. 서로 차를 바꾸기로 했다.

  바짝 허리를 세워 두 손으로 핸들을 잡는 내 운전 버릇 상 아내의 차를 타면 머리가 헤드 룸에 닿고 무릎을 조금만 세워도 핸들에 무릎이 걸리적 거렸다. 아무리 잘 관리했다지만 오래된 차 특유의 풍절음과 노면의 진동도 불편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차량에 블루투스 기능이 없어 서라운드 스피커를 통한 음악 감상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가 없는데 누군가가 내 차를 가져가고 이 차를 두고 간다면 그를 쫓아가 멱살을 잡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의 가벼움을 카트 라이딩과 같은 경쾌함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내 차가 나 혼자 몰고 다닐 때보다 더욱 가치 있게 쓰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성공해서 물 건너온 차량 한 번 타 봐야지 생각했던 총각 때는 13년 된 중고 경차를 타면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음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값비싼 가격은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다는 장벽을 만들고 이를 통해 타인의 선망이라는 가치를 만들어낸다 (물론, 고급차만의 승차감이나 편의, 드라이빙 감각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그러한 부분을 느낄만한 운전을 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내게는 논외였다.). 내 삶이 이런 것이다 라 논하기에 많은 고민이 필요했던 날에는 그러한 가치들이 중요했다. 삼각별 차량을 타고 지인들 앞에 서면 그들이 내게 괜찮게 살고 있다 말해줄 것 같았다. 그 괜찮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들도,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다 보니 가족 외 사람을 만날 시간 자체가 드물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마음으로 고가의 차량을 동경하던 마음은 많이 흐려졌다. 대신 혼란하던 나의 시간들을 늘 함께해주던 내 차에 대한 애착은 강해지고, 지금은 나의 아이까지 태워주는 그 한결같음에 일말의 감동마저 느낀다.

  내릴 때 타인의 시선을 느끼며 느끼는 뿌듯함, 고가의 차량을 몰다 보면 느낄 수 있는 그 우월감을 ‘하차감’ 이라 표현하는 모양이다. 그것이 잘못됐다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일궈낸 성과를 통해 타인의 찬사를 받고 그를 통해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 무엇이 나쁠까. 지금 경제 사정을 보면 중고차는커녕 B(us)M(etro)W(alking) 이 어울리는 내가 감히 느껴보지도 못한 그 감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단지, 삶에는 꼭 그렇게 비싼 대가를 치뤄야만 느낄 수 있는 의미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차량에 큰 돈을 할애하기엔 그 돈으로 내야할 세금과 분유 값이 너무도 크다. 그러니 그러고도 돈이 남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집을 사고 차를 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대출금 이자를 계산하는 어플이 무엇이 더 좋은 지 티격태격하는 것, 내 차를 뺏어간다 징징거리며 카시트를 옮겨다는 것, 아직은 어려 뒷보기를 해야 하는 아기 앞에 거울을 달아, 신호대기 중에 룸미러로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것, 그런 것들이 그 자체로 소중한 순간들이라는 것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결혼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직 이후 들른,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는 바다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아이유의 ‘밤 편지’를 틀어놓고 먹는 햄버거, 출근 두 시간 전, 한 시간 알람을 걸어 놓고 동해안선을 따라 갈 수 있는 곳 까지 다녀오는 그 느낌, 그리운 그 순간들.

  더 좋은 차를 손에 넣으면 더 괜찮은 사람임이 증명될 것 같고, 이른 나이에 이미 그러한 경제적인 여유를 손에 넣은 이들을 동경하던 어린 시절. 그러나 그 때도, 그런 마음으로 외제차 엠블럼만을 바라보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조각 행복은 늘 곁에 있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충분히 그 소중함에 젖어들지 못했고 감사하지 못했을까. 왜, 그 시간들이 행복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임을 미처 알 지 못했을까. 아쉬운 만큼 지금의 소소함은 잘 줍자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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