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일어나기 전 선잠 상태에서 종종 실실 웃는다. 눈은 감고 있는데 무슨 좋은 꿈을 꾸는 건지 히히, 히죽, 눈웃음만 살짝 지으며 아직 잇몸에 잠겨 있는 동글동글 젖니를 보인다. 볼을 꽉 깨물고픈 충동을 참고 보들한 배를 문질거리거나 한 줌에도 한참 남는 팔다리를 주물거리고 있자면 실눈을 뜬다.
잠결에 부모가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졸린 눈으로 함박웃음을 지어주곤 입과 콧구멍이 세 배는 커지게 하품을 한다. 코를 부비고 있자면 우유와 간이 없는 음식만 먹는 아이의 입 속 향기가 하품을 타고 좁은 아이 침대 머리맡을 그득히 채운다.
하품에도 향기가 있구나, 아이를 키우며 처음 알게된 세상의 아름다움 중 하나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한번 뿐인 삶을 살아내는 가장 완벽한 답인지를 늘 고민했다. 필요한 노력은 최소로 하고 행복과 만족은 극대화 할 수 있는 정교한 계획을 설계하려는 시도였다. 머릿속에서 각종 변수들과 가능성들을 열심히 떠올리고 인생을 계산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육아는 사실 사치스럽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지출이 예상되는 막대한 생활비, 교육비를 감당하며 노후까지 준비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예측되지 않는 육아의 행복은 막연하기만 한 데 반해 홀로, 혹은 결혼을 한다면 배우자와 단 둘이 꾸려갈 수 있는 기쁨들은 너무도 구체적이고 커보이기만 했다. 부가 아니면 불행을 되물림 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나는 아이의 행복을 책임질 자격이 있는 걸까, 수없이 고민도 했다.
그러던 내가 어느 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아간다. 단 한 번도 이것이 완벽한 답이라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서 그렇게 살아갔던 적은 없다. 젖어들듯 사랑했고, 선물받듯 찾아온 아이에게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인생은 정교한 전략으로 승리를 성취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잔잔한 일상이었고 때론 숨고 싶은 버거움이었으며 가끔은 작지만 눈물겨운 고마움이었다.
지금도 나는 무엇이 살아가는 답인지는 모른다. 단지 그 생각들이 담아낼 수 있었던 삶의 모습들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만을 안다. 어렴풋이 미리 상상하고 예측했던 지금의 하루, 지금의 내 모습, 나의 마음과 행복은 극히 일부이며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머리로 미리 떠올릴 수 있었던 기쁨들, 내가 내 삶이라 생각하며 설계했던 것들이 얼마나 될까. 매 순간마다 세상을 다 아는 것 처럼, 이제야 삶이란 것을 깨달은 것 처럼 생각하는 우리는 그 때 마다 번번이 얼마나 무지한가. 막연하고 예측불가능하게 주어지는 기쁨과 슬픔 앞에서 늘 겸손해진다. 삶이란 무엇이다 단정할 수 없는 것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이야기할 만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감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이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묵묵해 살아낼 수 밖에 없는 것이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다른 한켠에는 여전히 복잡한 금전 문제, 잘 해내야 하는 업무에 대한 부담감, 해결되지 않는 고민들이 가득하다. 그것들은 사라져야 하는 무엇이 아니며, 그것들이 해결되는 시점이 행복이 아니다. 그들 역시 지극히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행복이란 그저 그런 것들도 안은 채 모호하게 이어지는 삶을 살아내다, 문득 하품에도 향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조그만 감동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생각을 내려놓고 소중한 이들이 곁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산책을 나서자 조르는 아이의 고사리 손이 손가락을 잡아 끄는 압력을 느낀다. 내가 출근해 있는 동안 고스란히 아이의 성화를 받아내다 지쳐 소파에 잠들어 있는 아내의 이마를 조심 조심 쓸어 본다. 행복은 생각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