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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Mar 16. 2021

내가 더 고맙다고.

정신과 군의관 시절의 추억



복무할 때, 군 의료에서 정신과 군의관의 역할에 자괴감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현실적으로 군대란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고, 타국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높은 입영률을 유지하는 우리나라의 특성 상 이를 버거워하거나 이 환경에 잘 맞지 않는 장병들이 많다.

사회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비록 자기도 모르게 행복에서 멀어지는 삶을 반복할 지언정 스스로의 삶이 나아지고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진료실을 찾는다. 그러나 군에서 그러한 환자의 비율은 매우 낮다. 많은 인원들이 당연히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도, 진료를 통해 나아지는 대신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여 군을 벗어나 그 행복에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진료 과정은 종종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을 지를 이야기하는 정신과 의사와, 어째서 나는 이 환경에서는 결코 좋아질 수 없을 지를 설명하는 환자의 씨름이 된다. 그 중 상당수는 짧은 진료 횟수를 끝으로, 현역복무부적합 심의라는 절차를 통해 군을 벗어난다. 보상은 줄어만 가고 의무는 늘어만 가는 군생활, 그리고 무거워지고 두려움은 깊어만 가는 삶의 무게 앞에서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정신과 군의관의 마음은 허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에 진심인 장병들도 당연히 있다. 의지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가치관이 오히려 정신건강의학에 대한 편견을 더 공고히 하는 공간이 군대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정신과를 찾으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군을 나가기 위한 도구로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과 마음을 돌아보고파, 다소 따가운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진료실 문을 여는 이들. 그들과의 만남은 군에서 흐려지기 쉬운 정신과의사로서의 역할을 자각하게 해준다. 참 반가웠다.

36개월, 훈련 기간을 포함하면 39개월의 군 생활을 해야 하는 군의관은 18개월로 복무 기간이 줄어든 여러 장병들의 입대와 제대를 본다. 그 중에는 가끔,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 이 친구는 복무가 어렵지 않을까 속으로 알량하게 평가했던 친구들도 있다. 세간의 시선처럼 그가 나약해서는 아니다. 미성년 동생을 두고 입대했는데 유일한 보호자인 친모가 느닷없이 시한부 암선고를 받거나, 오래전 부모가 자신을 떠나 홀로 자신을 키워준 외조모가 갑자기 부고했다는 소식을 코로나로 휴가 한 번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듣거나, '마음이 약해서 그래' 라는 쉬운 한마디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슬픔들이 군에는 가득하다.

그런 그들. 진료실에서 많이도 울었던 그들. 현실의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과정을 함께 고민하고 애썼던 그들이 어느 새 웃으며 전역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퍽 감동적이다. 그들에게 전역증은 어떤 상패보다도 소중하고 뿌듯한 훈장이 된다. 그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요 보람이다.

현실의 무게가 너무도 버거워 군대와는 조금 이르게 안녕을 고했던 이들도 실패한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버거웠을 뿐이고 조금 더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에게 안녕과 행복이 깃들었기를 바란다. 삶이란 모든 순간이 마음처럼 이루어져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져서 의미있고 아름답다.

우스갯소리로 전역하면 내 이름을 검색해보고 개원하면 놀러오라고 이야기했던 친구들이 있다. 혹 이 글을 본다면 꼭 전하고 싶다.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잊지못할 기억과 보람을 안겨주어 내가 더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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