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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Jul 14. 2021

위선은 선이 아닐까.


  어릴 적에 광수생각이라는 만화가 유행을 한 적이 있다. 3, 40대 이상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보았을 신문 연재 만화였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여러개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편이 있다.


  만화는 복지 시설을 방문한 정치인들이 쌀이며 집기들을 기부하고 과시하듯 사진을 찍고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신문을 읽으며 그 장면을 보고 욕을 한다. ‘가식적인 정치인들, 선거철만 되면 저렇게 과시용으로 기부를 하고 광고에 써먹고.’ 그리고는 신문을 구겨 던지고는 돌아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설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가식이든 아니든, 우리에게는 그 도움이 소중합니다. 그들을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선행이라고 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암묵적인 기준이 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 어떠한 다른 의도도 없고, 때로는 힘든 내 형편을 무릅쓰면서까지 타인을 위할 때 우리는 선이라고 한다. 과시하거나, 다른 목적이 있거나, 금액이 소득 대비 대단하지 않거나, 여러가지 기준으로 선행의 '순수함'을 따진다.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기부나 봉사는 선행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비아냥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러한 경향을 주위의 힘든 사람들을 외면하는데 이용했다. 어차피 기부 같은 거 해 봐야 중간에서 다 가져가, 어차피 저런것들도 다 마케팅이야, 나도 살기 팍팍한데 무슨 기부야.


  그런 마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아내가 임신한 이후 부터 였다. 임신을 원하고도 일년이 넘어 생긴 귀한 아이였다. 매일 보던 아동 대상 기부 광고가 남 일 처럼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희귀병으로 고생하는 아이, 부모 없이 기초수급으로 생활하며 배고픔에 텅 빈 것을 알면서도 냉장고를 자꾸만 열어본다는 아이,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지도 모르는 부모의 반복된 방임과 폭력에 몸과 마음이 멍드는아이.. 수십년 동안 봐 왔고, 진료실에서도 수없이 만나왔던 아이들인데도 내 아이가 생기니 전혀 다른 감정이 전해졌다. 그동안 글로만 배우고 상상했던 아픔이 마음으로 꽂혔다. 화면 속 아이들이 나보다도 소중한 내 아이의 모습으로 겹쳐져 보였다. 쟤도 먹고싶고 하고 싶은게 많은 아이일텐데, 한참 사랑받을 예쁘기만 한 아이인데.. 애타게 아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가정도 있는데, 저 소중한 아이는 왜 저렇게 힘들어야 하는 걸까.


  아이의 출산 때 처음으로 보육원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관할 구청에 연락하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알아내는 일은 쉽다. 내 아이가 세상에 나옴으로써 기뻐하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현금 보다는 정말 필요한 물건을 전하고 싶었다. 구닥다리 생각이지만 쌀이나 식료품을 생각했는데 치약, 샴푸, 바디 워시 같은 생필품이 매우 부족하다고 했다. 당시 군의관 복무 중이었고 아내는 휴직 중 이었어서 우리 가구의 수입은 200만원 초중반 남짓 이었는데, 그에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금액으로만 생필품 가격이 저렴한 PX 에서 이것저것 물품을 담았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으로 택배를 부쳤다. 느껴보지 못한 뿌듯함이었다. 적은 월급이지만 생활비도 쓰고, 대출 이자도 갚고, 가끔씩 고기도 사먹고, 그리고 남은 자유로운 용돈을 할애한 돈이었다. 그 돈을 그보다 더 가치있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소비였다.



  개원을 하고 부터는 한동안 기부를 하지 못했다. 지극히 평범한 나의 마음으로는 당장 내야할 월세와 직원 월급, 대출 이자가 산더미인데도 그 중의 일부를 할애하여 나누는 것 까지는 무리였다. 대신 정말 열심히 면담을 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이 생기면 기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 내 아이와 다르지 않은 아이들에게 잠깐의 즐거움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그 느낌이 그리웠다.


  짧으면 반 년, 길면 2년은 걸릴 것이라 생각한 병원 운영 목표치에 첫 두 달 만에 닿았다. 면담 때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지양하는 편이지만 비이성적이고 마술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 될 수록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내가 잘 되고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을까.' 기쁜 마음에 대구에 이사를 온 후 처음으로 관할 구청에 전화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것마저 설레고 기쁜 일이듯, 전화 너머로 발벗고 필요한 기관을 알아봐주시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 부터가 즐거움이었다.


  전해들은 아동 보호 시설에 연락을 했다. 마침 기관에서는 체육시설을 꾸미고 있었다. 지금 제 형편에는 이 정도 금액이 가능하겠어요 라고 말씀을 전해드리면 이러이러한 물품은 어떨까요 라고 이야기를 돌려 주신다. 의외로 매우 담백하고 구체적으로도 기부는 이루어진다. 어떠한 크기의 마음이라도 그에 걸맞는 도움을 전할 수 있다. 그래서 그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작은 마음으로도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전화하던 날, 서로의 마음을 나누던 날, 물건을 하나하나 인터넷에서 구입하던 날, 배송지를 그쪽으로 설정해도 되지만 굳이 물품을 싣고 기관을 방문해 보던 날, 아이들을 만나던 날, 하루 하루가 어떤 여행지의 기억 보다도 소중하게 마음에 남았다.


 

  선과 위선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고결한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는 척 타인에게 아픔을 안기고 위법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돕겠다고 펀딩을 하여 요트를 사거나 자녀의 유학비를 충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잘못에 대해 손가락질 하느라 지극히 소시민적인 선의 작은 마음까지도 힐난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해 수십억의 수입을 올리는 유명인사가 알고보니 수 십년 동안 거액을 기부하고 있었다는 부분 만이 미담이 아니길 바란다. 대단한 수입이 아니더라도, 거기서 생필품 뿐만 아니라 때로 하는 외식비까지도 제하고서, 그 와중에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먹고 아낀 돈을 잘 갈무리하고 의미 있는 곳이 기부하는 것이 일상이 되면 좋겠다. 호텔 라운지나 신상 풀빌라 인증샷 처럼 새로운 기관에 방문한 사진이 sns에서 자랑이 되면 좋겠다. 그 자랑이 좀 더 일상이 되면 좋겠다.


  종교는 없지만 오랫동안 그 가르침들에는 관심이 많았다. 특정 종교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보다 가르침 자체가 주는 깊이와 평온이 좋았다. 그 말씀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로 통한다. 예수님은 우리 주위의 가장 힘든 이, 그가 바로 나이니 그를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다 하셨고, 부처님은 내게 돌아오는 자비에 감사를 느끼고, 그것이 온전히 나의 덕이 아님을 겸허히 깨닫고 타인과 나누어보라 하셨다. 억지로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억지가 되는 가치관으로 살아가느라 늘 가지고도 불안할 지도 모른다는 관점의 전환을 말씀하셨다. 그 따뜻한 말씀들에 감화되어 예수님과 부처님을 뵙듯 힘든 이들을 돌아보고, 이기심이 가득한 내가 위선으로라도 도울 수 있는 만큼만의 손길을 내밀어 본다. 그들의 말씀 그대로, 이 소비는 어떠한 사치품보다도 귀한 만족감을 준다. 매우 수지가 맞는 일이다.


  작은 정성을 나누며 느낄 수 있는 만족은 내가 더 나를 찾는 분들에게 성실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힘을 바탕으로 나는 내가 더욱, 또 꾸준히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더 많은 예수님을 모시고 부처님을 공양할 수 있는 여유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제넘지만 더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사치품의 구입이나 해외여행 대신 위선을 경쟁하면 좋겠다. ‘저거 기부해봤자 다 중간에서 해먹어.’ 가 싫다면 직접 기관에 전화하여 현물을 전해주면 된다. ‘어차피 저건 다 위선이잖아.’ 라는 힐난이 작지만 절실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논리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 아주 작은 손길로도 웃을 수 있는 아이들의 웃음이 가득해지면 좋겠다. 그 웃음은 왠지 왠지, 내 삶이 계속 잘 될 것 같다는 믿음과 힘을 준다.


  당신에게도 그 믿음과 힘, 따뜻함이 깃들기를 바라 본다. 당신이 허락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여유를 너무도 가치있고 소중하게 여겨줄 이는 분명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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