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

지극히 사적인 낱말들 (2)

by 아는 정신과 의사


내 윗 왼쪽 두 번째 앞니는 입 안으로 쑥 들어가 있다. 앞니와 송곳니, 양 옆의 이가 기울어 그 앞을 덮은 모양새라 대충 보면 그 공간이 비어 보인다.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까지 어린 우리 남매는 외조부가 돌봐주셨다. 유치도 처음에는 당신께서 직접 뽑아주셨다. 충분히 흔들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실을 둘둘 둘러 단단히 묶고는 확 잡아채 뽑는. 섣불리 미리 뽑지 않으셔서인지, 무서웠던 기억은 많은데 아팠던 기억은 없다.


몇몇 앞니들은 곧잘 그렇게 기다렸다가 잘 뽑아주셨는데, 왼쪽 두 번째 윗니는 왜인지 충분히 흔들리지 않았다. 치과를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외조부는 한참 남았으니 기다리라고만 하셨다. 어느 날 혀 끝에 이질적인 딱딱한 감각이 느껴져 입을 벌려 거울을 보니, 이 자리에서 한참 안쪽 입천장 방향으로 하얀 새싹이 돋아 있었다.

얼른 치과에 가 발치를 하였지만 한번 방향을 정한 이는 진로를 바꾸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 모두 치아가 고른 와중 나에게만 덧니가 생겼다.




외모 평가의 속뜻을 의미하는 글을 넷상에서 보았다. 공부 잘하게 생겼다, 착하게 생겼다, 성실하게 생겼다.. 평생 들어온 이야기들인데, 다 못생겼다는 의미라고 한다. 음.. 그랬구나.


배신감이 크지는 않았다. 유년기에는 고도비만이었던 적도 있고, 피부가 좋지 못하기도 했고, 지금도 작은 눈이 살 때문에 더 작았던 것 등등.. 나는 늘 외모에 자신이 없었다. 신경 쓰이는 부분 중 하나가 덧니였다.


사실 대부분은 내가 덧니가 있는지 없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덧니 때문에 못생긴 것이 아니라 못생김에 덧니가 더해진 것일 테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면 콤플렉스가 아니다. 외조부는 늘 덧니가 귀여운 개성 포인트라고 하셨기에 그렇게만 믿어왔고, 이것이 통상적으로 선호받지는 않는 외모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속상함이 있었다.


속상함을 탓할 대상이 생기면 불편함을 던지는 것이 사람이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에 대한 속상함이지만, 귀여움 포인트인 줄로만 알던 덧니가 미워 보이기 시작한 것을 핑계로 외조부에게 원망을 품었던 어린 시기가 있었다.


외모라는 것은 통상 매력적인 배우자를 만나거나, 누군가에게 호감을 구해야 하거나,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등에 필요하다. 삶의 시기와 궤적 상 그다지 외모가 필요 없어진 후에는 덧니를 그 모양 그대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단지 웃는 사진에는 덧니가 있어야 비로소 나 같은 느낌. 옳고 그름, 더 나음과 미흡함 과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되는데 참 오래 걸렸다.




처음으로 아이의 이가 흔들리길래, 어릴 적 생각이 나 실을 둘둘 두르고 뽑아주려다 공연히 피만 나고 아이의 울부짖음과 원망만 들었다. 조금 더 기다려볼까 하다 덧니 걱정에 얼른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가 발치를 해 주었다.


문득 덧니가 귀엽다, 요즘에는 그게 매력이다 하셨던 외조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당신이 어릴 적 자라오신 대로, 경험하신 대로 손주의 이를 돌보다 눈치 없이 비죽 솟아난 새 이를 보았을 때의 당혹감과, 손주의 엄마인 딸에 대한 미안함을 어렴풋이 상상해 본다.


한참 덧니가 날 때, 이가 나는 시기에는 혀로 이를 앞으로 밀어보라 반복했던 어머니의 죄책감도 알 것 같다. 그 정도로 이가 바로잡아질 리 만무하지만 바쁜 일상에서 이를 챙겨줄 여유도, 교정을 해 줄 여유도 없는 속상함에 지푸라기를 찾으셨던 건 아닐까.




외조부는 학부 때, 다니던 학교의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알고 있던 병환 때문은 아니었다. 바쁜 본과 시험 준비를 핑계로 응급실에 오셨을 때, 잠깐 내려가 본 게 다였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도 나지도 않는 응급실 인턴이며 던트들에게 선배랍시고 인사하기 바쁜 손주를 웅크리듯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누구도 준비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제가 잘나서 큰 것 마냥 제 살기 바빠 그 오랜 시간을 길러준 고마움 한 마디를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두부 구이를 좋아한다. 어머니의 넓적하고 일정하며 노릇한 그것과는 다르게 외조부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깍둑썰기로 볶듯이 익혀 주셨다. 맛이 무언가 부족해 아쉽다는 느낌 외, 익숙지 않은 칼질을 하셨을 외조부의 노고를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제는 덧니를 보면 그립다. 실을 이에 두를 때의 실 맛과 그때의 긴장감이 그립다. 맛이 부족한 듯 깊었던, 제멋대로 깍둑 썬 두부구이가 그립다.


거울 속 덧니를 볼 때 부끄러움이나 아쉬움이 아닌 그리움이 드는 데 이렇게도 오래 걸렸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이렇게도 오래 걸렸다. 삶은 짧기만 한데, 사람은 늘 이렇게도 오래 걸리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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