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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Sep 08. 2019

이별한 당신과 나누고픈 이야기

글을 쓰며 떠올리는, 아주 오래된 이별의 기억

 

  오랜 연애 끝에 이별한 적이 있다. 만남의 기간이 만만치 않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 나이다운 치기어리고도 낭만적인 미래를 그렸었고, 그에 기반 해서 하나 씩 삶의 선택을 해 나가던 참이었다. 한 순간에 그간의 모든 삶이 무위로 돌아간 느낌, 그래서 삶이 전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의식 없이 보내던 일상에 이질감이 느껴졌고 어딘지 모르게 하루하루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슬픔 이상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느낌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그 때 부터 좋은 일, 옳은 일, 소위 ‘생산적인 일’ 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일' 에 몰두했다. 운동을 하고, 관심도 없던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불편한 마음이 찾아올라치면 애써 모른척하고, 다른 일에 빠져들려 노력했다. 그러고도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올 땐 영화를 봤다. 본 영화를 보고 또 보며 머릿속을 낯선 감정들 대신 익숙한 대사들로 채우곤 했다.

   집에 나와 내 마음만 남은 어느 날 밤. 살며시 마음이 나를 두드렸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오랫동안 멀리하던 소주 한 병을 사 와 홀로 따랐다. 마음은 특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힘들 지 않냐고. 나 지금 너무 힘들다고. 우리 조금만 힘들어하면 어떻겠냐고. 실컷 힘들어하면, 그러면 다시 조금 괜찮아 질 것 같다고.’ 비로소 눈물이 났다. 소리 내어 울었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경험, 가장 짙게 느끼는 슬픔이었다.

  다음 날 무언가가 바로 달라진 건 아니었다. 이유 모를 부적절감 역시 하루 아침에 마음을 떠나진 않았다. 그래도, 그냥 살았다. 시험공부를 놓진 않았지만, 충동적으로 시작했던 영어 공부는 그만뒀다. 기분이 내킬 땐 친구들과 함께 한 잔 했고, 힘들다는 말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홀로 있을 땐 그냥 슬퍼했다. 그러고도 또 슬프면, 다시 슬퍼하고 말았다. 그런 나날들이 쌓이며, 하루에 하루만큼 씩 괜찮아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 슬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별했지만 나는 괜찮고 여전히 내 삶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 마음 아래에는, 실은 지금의 내 삶이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안다. 그 때의 내 삶도 괜찮았고, 잘못되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때의 경험들은 오늘 느끼는 행복의 씨앗이라는 것을. 그러나 분명 그 때의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슬플 때는 슬퍼해야, 기쁨이 찾아올 때도 마음 편히 기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웃기 위해 시간이 많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 역시 무언가 잘못 되어서는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아픔이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아무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상처가 아물려면 상처에 걸맞은 시간이 필요하다.





  책을 준비하며, 아래의 글에 추가할 만한 경험담을 써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토록 아팠던, 기억에서조차 멀어진 이별의 기억을 되짚으며 그때의 슬픔이 되살아나는 대신,  마치 졸업앨범 속 부끄럽고 촌스러운 과거의 모습을 보듯 마음이 미소와 그리움으로 물들었다.


   가능하다면  그때의 내게, 또 상실과 외로움의 아픔에 젖은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이런 날이 올 까' 의 그 날은, 언제일지 또 어떤 모습일지 미리 상상하긴 힘들지만, 대개 언젠가는 온다.  



(추가한 글: 상처가 가려워도 덧나지 않게 그냥 두듯 )

  https://brunch.co.kr/@cafeformind/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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