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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Oct 12. 2019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데

너의 아빠로 살아가자 마음먹은 날, 비로소 깨닫는 것들


  살다보면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무엇이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한가 하는. 반복되는 당직 콜에 20분 이상 이어지지 못하는 잠, 그렇게 4일 연속으로 당직을 서고, 이틀은 정상근무‘만’ 하고, 다시 휴일 없이 당직이 시작되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기엔 삶이 너무도 고단하다 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주 가끔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인생이 불만족스럽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공연히 태어나서 고통스럽다는 생각만큼이나 살아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도 생각했고, 살아있다는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다만 납득되지 않는 물음에 어딘가 한 구석이 허전했다. 그저 살아가다 살아감을 마무리하는 것이 삶이라면 이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리 아둥이고 저리 바둥이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가 바라보는 내 삶, 내가 바라는 것들, 사랑하는 것들,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라면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움직이는가. 




  17시간의 진통 끝에 아이가 태어났다. 15시간 째 쯤 일까, 아이의 머리가 골반에 걸려 내려오질 못했고, 그 상태로 지친 아이의 심박 수가 쳐졌다. 당직 선생님께 30분 정도만 더 지켜보고 변화가 없으면 제왕절개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는 자연분만을 간절히 원해, 열 달 동안 함께 자연주의 출산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강좌를 들어 왔던 터다. 그리고 30시간 전 부터는 한 숨도 자지 않고, 20시간 넘게 굶은 채로 산통을 견뎌 왔다. 


  그 마지막 30분 동안 아내는 그 동안의 통증, 고단함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지시대로, 기계적으로 호흡하고, 힘을 빼고 또 줬다. 평소 애교 겸 작은 통증에도 호들갑이던 아내는 격렬한 산통에 몸을 떨면서도 힘을 줄 때는 옅은 신음조차 뱉지 않았다. 처음 느끼는 그 엄숙함이 두려웠다.


  수술 준비를 마치고 들어온 선생님이 마지막 내진을 하시곤 한껏 고무되셨다. 내려올 수 없는 위치에 있던 아이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잘 내려와 있다고 했다. 고지를 넘은 아이가 막상 세상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삼기엔 너무나 찰나였다. 아내의 느낌으론, 아이의 머리가 나온 다음에는 굴이 흐르듯 아이의 몸이 마저 나왔다고 했다. 엎어진 상태로 들어 올려지는 아기, 희끄무레한 태지가 덕지덕지하고, 산소가 모자라 푸르죽죽한 피부에 핏덩이가 엉겨 붙은 머리칼,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것이 내 아이, 분명 내 아이다, 자꾸만, 그 말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눈물이 났는데 감동해서도, 슬퍼서도, 기뻐서도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손을 잡고 있는데, 아이가 그 곁에 누울 수 있다는 게 고마워서 그래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겪어보지 못한 감정을 지식으로 평가하고 텍스트로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대게 그러한 작업을 할 때에는 그럴듯한 학문적 근거를 빌리며, 단순한 평가 보다는 평가 절하의 뉘앙스로 이어진다. 예컨대 출산의 기쁨은 호르몬의 칵테일로 설명할 수 있다. 격렬한 고통은 산모의 신체에서 수많은 내인성 아편계 호르몬 분비를 유발하고, 이는 마치 러너스 하이와 같은 쾌감으로 이어진다. 자궁 수축을 위해 분비되는 옥시토신은 아이와 엄마와의 강렬한 애착반응을 형성한다. 운명 공동체와 아이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남편의 불안은 출산 이후의 아이와 엄마의 건강을 확인 한 후에 커다란 안도감, 쾌감으로 바뀔 것이다. 이러한 신체의 작용은 이기적 유전자의 전달을 위해, 유전자 전달 기계인 신체에 진화심리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럴듯하고, 명료하다. 그러나 직접 그 과정을 경험한 나의 감상은,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데.’ 이다. 아기를 위해 고됨을 감수하고, 돈이든 시간이든 그토록 중요히 여기던 삶의 일부들을 기꺼이 내어주는데 있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 그리 중요한데. 전적으로 우리 부부의 선택이었기에 희생이란 말은 맞지 않고, 외려 그 선택에 대한 책임감만을 절실히 느끼는 지금, 우리에게 밀려오는 뭉클함의 생물학적 기전이 뭐가 중요한데. 이미 너는 내게, 너를 알고 너를 만날 수 있어 다행임을 알게 해 주었고, 나는 남은 삶을 너의 아빠로 살아도 좋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온전히 나 하나만을 위해서라면 어쩐지 무리하는 중인 것만 같았던 그간의 삶, 과하다 느껴진 그간의 노력들도, 그 모든 과정이 너와 함께 하는 행복을 꾸리기 위해서라면 쉽게, 심플하게 납득이 된다. 그 간의 나는 그래서, 너의 아빠가 되고 너의 아빠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버텼었구나. 




  ‘그렇다면, 왜 굳이 결혼을 하고 애를 낳지?, 왜 굳이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해야 해?’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저 웃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웃음의 느낌은 왜 이별을 알면서 다시 사랑을 하느냐, 왜 편한 길을 두고 꿈을 좇느냐 와 같은 질문을 들을 때의 마음과 결이 비슷하다. 그러나 훨씬 묵직하고도 뜨거운 질감이다. 


  질문의 요지에는 단 하나도 틀린 내용이 없음을 안다. 홀로 하루를 결정하는 자유로움, 온전히 나 하나만을 위해 소비하는 여유로움이 그리울 때도 물론 있다. 그래서 웃을 수밖에 없다. 단지 이제는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가 왜 그렇게 비싼지, 부모는 인생을 아이에게 다 주고도 왜 항상 부족하다고 하는지, 대신 아플 수 없다는 것이 왜 그렇게 미안한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런 마음이다. 굳이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납득해 주지 않아도, 그냥 그렇다. 그런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로 족하다.




  하루를 보내며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우주였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소홀했던 인연들에 너무도 미안하고 송구하다. 조금 더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세상의 모든 우주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이다.




  그래, 모든 게 너를 위해서 라고만은 할 수 없을 거야. 우리가 달이를 만나려 했던 것도, 우리가 더 행복할 것 같아서 일거야. 그런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 선택마저 어떤 거대한 운명의 일부였던 건 아니었을까. 지금은 행복 하고픈 이유조차 행복한 아빠가 좋은 아빠일 것 같아서, 행복할수록 네게 좋은 아빠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라는 생각이 든단다.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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