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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Apr 26. 2020

무조건 좋아진다 말할 수 없는 마음.

 블로그에 광고를 덧붙이지 않는 이유.


  전공의 때 한 소년이 나를 주치의로 하여 입원했다. 환자의 정보라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비전형적인 환각 증세를 호소하며 내원했다. 남성의 경우 조현병을 비롯한 정신증의 호발 연령은 20대 즈음인데 아이의 경우 조금 일렀다. 아주 특이한 케이스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비전형적인 경우라 치료방침을 설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


  환청이나 망상 같은 정신증 증상의 주요한 원인은 뇌 속 신경전달물질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등등..) 의 불균형으로, 약물 치료 등 생물학적 개입이 그 치료의 핵심이다. 또한 정신증은 잘 치료되지 않으면 점차 경과가 악화되고 만성화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초기에 비해 호전 가능성 및 치료 결과가 매우 좋지 않아지기 때문에, 많은 책임감을 가졌다.


  책을 찾아보고 그토록 싫어하는 논문을 들춰본 후 교수님께 의견을 드렸고, 지침 받은 약물 치료와 위기개입, 면담을 시행했다. 경과는 많이 좋아졌다.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만 있던 아이가 주변이 병원인지를 인식하고 아침에 먹은 밥반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는 보호자가 병원에 왔다. 처음 보는 조모를 대동한 채 였다. 보호자들은 퇴원을 강하게 요구했다. 본인들이 보기에 경과가 많이 호전되었고, 집에서 편안히 돌보아주고 학교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상태 자체는 많이 호전되어 퇴원 기준을 조율할 만한 시기였던 것은 맞았다. 임상적인 감으로는 좀 더 경과를 보고 싶었지만 입원기간이 상당히 길어져 아이가 지쳤던 것도 사실이었다. 꾸준히 외래 진료를 시행하기로 하고, 무엇보다 투약을 엄격히 지킬 것을 단단히 약조 후 퇴원하였다.


  그리고 아이는, 약이 떨어졌을 시일이 한참이 지나고도 병원에 오지 않았다.


  아이를 다시 만난 것은 응급실에서였다. 현실 검증력이 소실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중으로, 대화는 불가능했다. ‘양약’ 을 오래 먹으면 머리가 상한다는 조모의 뜻에 따라 약을 중단했다고 한다. 크게 굿을 하고, 아는 사람에게 추천 받은 용하다는 약을 열심히 달여 먹였다고 했다. 조모는 응급실에는 함께 오지 않았다.


  굿에 들어간 비용만 수 천 만원이 넘었다고 했다. 그 말씀은 하시지 않으셔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모든 의학을 통틀어 환자에게 치료 방침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근거다. 누군가가 좋다고 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덕을 봤다더라, 는 의학적으로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만약 내가 ‘코로나 환자에게 박수를 쳐 주는 것이 치료에 효과가 있다.’ 고 주장한다고 하자. 통계상 상당수의 환자가 해열제 등 보존적 치료만으로 인체의 면역을 통해 호전 되는데, 앞서의 논리가 옳다면 ‘코로나 환자에게 박수만 쳐 주면 상당수는 좋아진다.’ 는 주장도 옳은 것이 된다. ‘환자가 좋아졌다.’ 는 사실이 의학의 전부가 아니다. 과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설득력 있는 인과관계와 이를 통계적으로 의미 있게 증명할 수 있는 근거다.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방법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설계되었고 윤리적 문제도 없다는 것이 공신력 있는 기관을 통해 검증이 되어야만 비로소 연구 자체가 시작될 수 있다. 설계상의 오류나 주장하는 가설의 비과학성, 윤리적 문제 등으로 연구 허가 자체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연구를 몇 단계를 걸쳐 시행하여, 심각한 부작용이 존재하지 않고 그 치료효과가 ‘기존에 검증된 치료 방법들에 비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의미가 있어야 비로소 한 치료방법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수만, 수십만의 약물 후보 물질, 치료 방법들 중 임상에 적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과 몇 개가 되지 않는다. 병원을 내원한 환자에게 이 치료를 적용하는 것이 ‘적어도 치료를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분명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 고 겨우 권하기 위해서는 이토록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의학은 언제나 겸손하다. 매 순간마다 ‘무조건 낫습니다.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라 자신 있게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의사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만을 전해야 하고,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어느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 결과들만을 놓고 대화해야 한다. 초발 조현병 환자에게 ‘약만 잘 드시면 무조건 좋아지실 거에요.’ 라는 듣기 좋은 말 대신 ‘20%~ 30%는 어떠한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는 만성적인 경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라는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이는 연구 결과일 뿐이고, 현재 이러이러한 특성을 미루어 보면 충분히 치료에 잘 반응할 확률이...’ 라는 뒷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평생 이 쓴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가요?’ 라는 질문이 메아리처럼 늘 돌아온다.


  부모 된 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이 너무 이해된다. 어떠한 조치를 통해 아이만 괜찮을 수 있다면 수천이든 수억이든 무엇이 아깝겠는가. 나라도, 어떻게든 빚을 끌어서라도 기꺼이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더 이성적으로, 신중히 판단하시기를 늘 이야기한다.


  “고용되어 월급 받는 의사 입장에서는 환자가 한명 늘든 줄든 제 밥벌이랑은 상관없어요, 환자 줄면 오히려 같은 월급에 제 몸은 더 편하죠. 그렇지만 저는 제 가족이 아프면 언제나 의사와 꼭 상담하라고 해요. 세계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매달려서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과학적으로 구분하는 중인데, 듣기에만 쉽고 편한 길을 가시는 게 안타까워요. 그런 것들이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크게 상관이 없는데, 중요한 치료시기를 놓치고 아이의 삶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해를 끼치는 것을 마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의사의 마음은 너무 힘들 때가 많아요. 의사 대 환자가 아니라, 같은 아이를 둔 부모로서, 가족을 둔 한 인간으로서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약만 먹으면 완치 100%’ 를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의사의 말은 불안을 조장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상술로 여겨질 때가 많고, 세상에는 매번 이해하기 힘든 의학적 지식과 숫자를 들먹이는 의사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이들이 널려 있다. ‘이렇게만 하면 무조건 좋아집니다. 현대의학이 모르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늘 똑같은 형태의 안타까움을 반복하여 마주하곤 한다.


  초록색 블로그에 글을 실은 지 3년가량 되었다. 첫 2년간 블로그 방문자 수는 총 (하루 방문자 수가 아님) 마흔 분 남짓이었다. 그런 건 해서 뭐하니, 쓸데없는 데 에너지 쓴다고 아내에게 핀잔도 많이 얻어먹곤 했다. 그래도 스스로가 생각하는 의미를 좇아 꾸준히 하면서, 과분한 기회들이 주어져 신문에 글을 싣고 잡지에 기고도 하고 하더니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늘어 몇 달 전 네이버 로부터 광고를 달아도 좋다는 메일이 왔다.


  알아보니 보통 한 달에 커피 몇 잔 값 정도가 입금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내에게 공돈으로 아메리카노 한 잔 사다줄 수 있다면 조그만 유세는 해 볼 수 있겠거니 해서 광고를 달아 보았다. 정신과 의사의 블로그라 그런지, 배너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가득했다. ‘정신과약 먹으면 안 되는 이유’ ‘정신과약 끊는 법’ ‘약 없이 면담만으로 우울 탈출하기’


  서글펐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논쟁을 떠나, 마음이 힘든 이들과 그 가족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광고는 즉시 내렸다. 앞으로도 블로그에 광고가 개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쓸데없는 일이란 핀잔을 꾸준히 들으며 계속 쓰고 또 읽으려 한다. 의과학자로서의 이성과 의사의 양심을 걸고서 나를 찾는 이들에게 조금 이라도 더 행복을 나눠 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안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나의 보람을 구하도록.



 (사진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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