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블랙홀

by 심수미

어릴때 본 영화 중에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게 있었다. 남자 주인공 빌 머레이가 자고 일어나면 매일 같은 날이 되풀이된다. 같은 라디오 알람이 울리고 같은 동네 사람이 같은 멘트를 하고 같은 사고가 벌어진다. 어떻게든 이를 피해보려고 죽음까지 시도하지만 여지없이 라디오 알람과 함께 눈을 뜬다.


요즘 나의 일상이 그러하다. 어제가 그제같고 오늘이 어제같다. 아기의 수면교육을 위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벌써 7kg을 넘긴 아기는 3~4시간 간격으로 150ml씩 먹는다.(그나마 밤에는 6시간씩 길게 자준다.) 애를 낳기 전에는 수유 간격이 3~4시간이라면 최소 2시간은 자유 시간이 주어질 줄 알았다. 천만의 말씀이다. 분유 먹는 데 15분, 트름하는 데 15분, 모빌과 역방쿠와 터미타임 한순번씩 돌면서 율동을 곁들인 동요를 30~40분 열창해주면 눈을 꿈뻑거리면서 칭얼대기 시작한다. 아직 침대에 등 대고 누워서 혼자 자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안거나 업거나 하여튼 둥가둥가 해주면서 또 20분 가량은 씨름해야 한다. 애가 낮잠자는 시간은 1시간 남짓. 그 시간에 아기 옷 빨래를 하거나 젖병 설거지를 하거나 밀린 밥을 먹거나..그러다보면 또 들리는 "흥애~"


나의 불안과 스트레스는 안면마비 후유증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예약을 잡고 만난 정신과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한 첫마디는 "제가 없어져버릴 것만 같아요"였다. 아기가 귀엽고 예쁘고 행복할수록 '일을 예전처럼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동시에 든다. 아기가 거울을 보는걸 좋아하니 안고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보여주는데, 그때마다 의도적으로 나를 보지 않기 위해 아기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한다. 아기 얼굴에는 프랑스산 유기농 어쩌구 세럼과 로션을 발라도 정작 내 얼굴에는 뭐 바를 정신이 없으니, 가뜩이나 후유증으로 못생긴 얼굴이 푸석하기까지 하다. 애가 나온지 석 달이 되어 가는데도 불룩 나온 배도 그대로다. 우울할 땐 나가서 뛰어야 하는데 기분 내킨다고 훌쩍 달리러 나갈 수도 없다. 선생님은 정말 많은 어머니들이 비슷한 감정을 호소하신다며 출산과 육아의 노고를 치하해주셨다. 그리고 항불안제를 처방해줬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진짜 약효가 잘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잘 되겠지 뭐.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초등학교때인가 중학교때인가 봐서 몇 장면만 선명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사랑의 블랙홀'은 대략 이기적이고 모난 성격의 주인공이 시골마을의 반복되는 일상을 살면서 진정한 행복과 사랑을 깨닫는다는 해피엔딩 스토리였던 것 같다. 지금의 이 지루한 듯 평온하게 반복되는 일상도 나를 변화시켜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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