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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l 19. 2023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포루그 파로흐자드

이 책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세기 가장 중요한 여성 시인 중 한 명인 포루그 파로흐자드 시집입니다. 처음 이 책을 접하게 된 건 통영 여행을 갔던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행지에서 무작정 들어간 조그만 서점에서 이 책을 만났습니다. 여행 중에는 짧고 가벼운 책이 좋아서 별생각 없이 골랐는데, 오히려 마음이 깊어지면서 무거워졌습니다. 여행 중에 수시로 꺼내보며 읽고 또다시 읽게 되는 매력적인 책이었습니다. 그녀의 다른 책도 궁금해 찾아보았지만 국내에서는 그녀의 영어 번역본조차 구하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그녀는 1935년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에 결혼해 아들을 낳습니다.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는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두려 하였고 남편은 히잡을 벗고 파마를 한 그녀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결국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긴 채 이혼을 당하는데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걸로 추정이 됩니다. 그녀는 총 4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이혼한 여성이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내어 탄압을 당하여 자유를 갈망하며 쓴 첫 번째 시집 <포로>, 이혼과 양육권을 뺏기며 절망하며 쓴 두 번째 시집 <벽>, 유럽을 다녀오며 이란에 화두를 던지며 쓰게 된 세 번째 시집 <저항>, 거부할 수 없었던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불륜이라 말이 좀 많았습니다.) 쓴 마지막 시집 <또 다른 탄생>, 이렇게 총 4권이 있습니다. 국내에는 지금 이 책 한 권만 있는데 그녀가 쓴 시 중 54편 만을 골라서 만든 시집입니다. 


파로흐자드가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이란 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가 개봉되면서부터였습니다. 이란 시골 쿠르드족 마을을 배경으로 한 할머니의 전통 장례식을 촬영하러 온 다큐팀의 좌충우돌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영화답게 작품성도 뛰어났고 특히 묵시록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이 압권이었습니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나의 작은 밤 안에, 아

바람은 나뭇잎들과 밀회를 즐기네

나의 작은 밤 안에

적막한 두려움이 있어

들어 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나는 이방인처럼 이 행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절망에 중독되어 간다

들어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지금 이 순간, 이 밤 안에

무엇인가 지나간다

그것은 고요에 이르지 못하는 붉은 달

끊임없이 추락의 공포에 떨며 지붕에 걸쳐 있다

조문객 행렬처럼 몰려드는 구름은

폭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순간

그다음에는 무

밤은 창 너머에서 소멸하고

대지는 또다시 숨을 멈추었다

이 창 너머 낯선 누군가가

그대와 나를 향하고 있다

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 이여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에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이 시를 같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보수적인 이란 사회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한 여성이 자유와 열정을 가지고 살았지만 32살의 나이에 의문의 비극적 교통사고로 요절하고 맙니다. 아름다운 페르시아어로 된 그녀의 시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게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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