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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l 19. 2023

빨강의 자서전

by 앤 카슨

책 제목 밑에 쓰여 있는 '시로 쓴 소설'이라는 문구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함축적인 언어인 시가 어떻게 소설로 될 수 있을지 궁금하였고 첫 장부터 서점에서 몇 줄 읽다 구매하게 되었던 책이었습니다. 가끔 책을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은 건지 하고 한번 더 탐독하게 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저자가 시인이자 고전학자라서 시적인 언어를 사용하였고 헤라클레스의 과업 중 열 번째 과업이었던 괴물 게리온에 관한 이야기여서(당시에 잘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도 따로 찾아서 읽어봐야 했기에 수고로움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시처럼 문장 중간중간 줄이 바뀌고 함축적인 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스테시코로스의 게리온에 대한 서사시인데 대부분이 소실되고 극히 일부분만 마치 잠언 모음집처럼 순서 없이 남아 있다고 하는 서사시였습니다. 작가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를 현대식으로 재창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 작업이 이뤄져야 하는 동기를 헤라클레스가 활로 쏘아 죽인 게리온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약점인 빨간 날개를 숨겨야 하는 입장이었고, 남들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했던 늘 부당하게 당해야만 했던 자신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내적인 것만이 자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서전을 쓴다는 내용입니다.           



P : 형용사는 그저 부가물에 지나지 않는 듯 하지만 다시 잘 보라. 이 수입된 작은 메커니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특정성 속에서 제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형용사는 존재의 걸쇠다.     


P : 약해져 가는 빨강 맥박의 환상적인 열기 속에 똑바로 누워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내적인 것은 내 거야, 그는 생각했다.     


P : 정신이 홀로 은밀히 지배한다 육체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P :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건/ 상상력이 자동적으로 풍경을 다시 칠하고 습관이 지각을 흐리고/ 언어가 틀에 박힌 윤색을 재개하는/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망각으로의 느린 귀환이다.      


P : 새로운 결말.

온 세상에 아름다운 빨강 바람들이 계속해서

불었다 손에 손잡고          



시로 쓴 소설이라 리듬감도 있고 짧게 짧게 문장들이 나열되어 읽는데 부담이 없습니다. 문장들이 책 속의 표현대로 ‘빨간 날개’스러웠습니다. 처음 보는 문장들이 많아 번역의 문제인가 싶었지만, 작가의 표현 방법이 그러했다는 걸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문장들이 아름다웠던 시와 한 사람의 자서전을 동시에 읽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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