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오늘도 2시 13분이다. 쉬는 날이지만, 늘 이 시간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 옆에서 핸드폰 불빛이 희미하게 떨린다. 아무 알림도 없다. 세상은 고요하고, 그 고요 속에서 내 삶의 소음만 들린다. 그래도 잠들지 않는다. 이유는 딱히 없다. 왜 하필 2시 13분이었을까. 정확히 언제부터 그 시간이 내게 붙은 건지 잘 모른다. 어느 날 눈을 떴고, 시계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뒤로 이상하게 그 시간에는 눈이 떠있다. 마치 시계가 깨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면 내 몸이 그 시간에 맞춰 스스로 작동하는 것처럼 깨어있다. 그건 별로 특별한 시간도 아니다. 2시 13분은 새벽 2시보다도, 3시보다도 애매하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다. 세상은 잠들기 시작하고, 새벽의 새는 아직 노래하지 않는다.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팝송이 끝나고 광고가 흐른다. 핸드폰은 여전히 잠자코 있고, 냉장고는 묵묵히 콤프레셔를 돌린다. 그저 그런 시간이다.
그때마다 일어나 마실 것을 찾는다. 부엌 불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앉아 어둠을 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나쁘지 않다. 그 어둠 속에서 잠시 멈출 수 있다. 출근도, 일도, 인간관계도, 내일 아침의 커피도 당장은 필요 없다. 그냥 시간만 있고, 나만 있다. 그 사소한 침묵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린다. 어쩌면 그게 2시 13분을 좋아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세상이 완전히 멈춘 듯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느껴지는 시간, 그 시간을 쫓는다.
1
일할 때 쉬는 시간 안에 늘 2시 13분이 있다. 그 시간에 의자를 뒤로 밀고 앉는다. 허리와 손목이 욱신거린다. 적게 넣은 얼음은 녹아있고, 머리는 텅 비어있다. 누군가 내 하루를 시침과 분침으로 잘라낸다면, 그 조각 중 가장 조용한 틈이 아마도 지금일 것이다. 2시 13분이 내 안에 들어온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시간에 눈은 정확히 떠있다. 알람을 맞춘 적은 한 번도 없다. 눈꺼풀을 여는 일조차 이제는 내 의지가 아니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익숙한 시각에 다시 도착한 것처럼 그렇게 이 시간을 인지하고 있다. 핸드폰을 켠다. 불빛이 얼굴을 비춘다. 눈이 부시지만 끄지 않는다. 내 하루의 마지막 온기 같다. 주변이 조용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을 삼킬 시간이다. 그 시간은 묘하게 숨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세상은 자고 있지만 완전히 잠든 것도 아니다. 꿈과 현실의 중간쯤, 무언가 살아 있는 숨 쉬는 듯, 이미 죽어버린 것들이 머무는 시간, 그 경계선 위에 앉아 있다.
그럴 때마다 오래된 꿈이 떠오른다. 책상 앞에서 새벽을 새우던 시절, 단어를 붙잡고, 문장을 세우며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 했던 시간들, 그 욕심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게 아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흩어졌다. 그걸 붙잡지 않았다, 아닌가, 못했다가 정확할까? 대신 현실과 타협했다. 월세, 대출, 카드 값, 공과금, 그것들이 내 문장을 대신 썼다. 이제 나는 일을 한다. 낮에는 멀쩡하다. 웃기도 하고, 대답도 한다. 하지만 밤이 오면 세상은 천천히 투명해지고, 그 속에서 2시 13분만 남는다. 그 시간은 이상하리만치 정확하다. 2시 12분은 없다. 2시 14분도 없다. 항상 그 시간이다. 그것을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그것이 나를 찾아오는 건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순간이 되면 소리와 빛이 모두 뒤로 밀려났다. 그 정적 속에서 숨을 쉰다. 그 숨은 짧지만, 진짜 내 것이었다.
핸드폰 화면에 시간이 흐른다. 2시 13분이 2시 14분이 되는 순간, 마치 무언가를 놓치는 기분이 든다. 그건 꿈의 파편일지도 혹은 내가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한 욕망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은 다시 돌아간다. 시간은 2시 15분이 된다. 다시 눈을 뜨고 감고를 반복한다. 쉼도 잠도 쉽게 오지 않는다. 어쩌면 2시 13분은 나의 틈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나를 잊고, 나도 세상을 잊는 시간, 그 짧은 순간에만 나는 살아 있다. 덜 슬프고, 덜 따뜻하게.
2
2시 13분. 다시 그 시간이 되었다. 몸을 돌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저절로 떠졌다. 창문은 닫혀 있고, 바람은 없다. 대신 어디선가 진동이 들린다. 쉼 없이 돌아가는 냉장고와 오래된 시계의 울림이다. 그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아니, 시스템이 아직 나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모두가 잠든 사이, 어둠은 모든 것을 감싸 안았지만, 나 혼자만이 깨어 있는, 쓸쓸한 착각이 스쳤다. 그건 우월감이었고, 약간의 위안이자 자만이었다. 세상이 나를 잊은 시간, 나 혼자 존재하는 정적, 하지만 요즘은 그 정적조차 낯설다. 이건 선택된 고독이 아니라, 반복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몸, 정확히 같은 시각에 깨어나는 눈, 그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훈련된 반응이다. 벽에 걸린 낡아진 달력은 지난달 그대로 멈춰 있다. 바꿔줘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숫자들은 나를 감시한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또 하나의 날짜를 넘기지 못한 사람으로 남는다. 시간은 흐르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마치 체계의 바닥에 붙은 먼지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 존재로 용기 없이 흐르지 못한 채 붙들려있다.
이 시간의 정확함은 누구를 위한 걸까. 왜 하필 2시 13분일까. 몸이 그 시각을 기억하고, 의식이 그 숫자를 향해 열린다. 그건 마치 누군가 내 안에 작은 기계를 넣어둔 것 같다. 나는 그 기계의 한 부품일 뿐이다. 하루의 리듬은 일정하고, 피로는 예측 가능하다. 심지어 내 불면의 간격조차 일정하다. 자유롭다고 느끼는 그 순간, 이미 감시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간은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의 모양을 흉내케 한다. 모두가 잠든 동안 깨어 있지만, 그건 해방처럼 보일 뿐 사실은 또 다른 감시다.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잠들지 않는 눈이 감시하고, 내가 나를 기록한다. 감시자는 사라졌지만, 감시는 스며있다.
공기가 무겁다.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세어보면 일정한 간격이다. 규칙은 언제나 따라온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조차, 나는 규칙의 일부다. 그건 안심이기도 하고, 동시에 질식이다. 그 경계에서 숨을 쉰다. 짧게, 조심스럽게, 마치 내 숨소리마저 누군가 듣고 있을 것처럼 그렇게 쌔근거린다. 내가 쓰지 못한 문장들, 읽지 못한 책들, 떠오르다 사라진 문학의 잔상들이 이 시간의 벽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부르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입을 여는 순간, 그건 또 하나의 역할이 될 테니까. 그저 조용히 바라본다. 그 침묵 속에서, 내가 얼마나 체계에 길들여졌는지 느낀다. 2시 13분은 자유가 아니다. 그건 습관의 정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기다린다. 그게 내 하루의 유일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붙잡는 대신, 기다림을 붙잡는다. 그 기다림이 나를 지탱한다. 허무는 절망이 아니다. 그건 의식의 형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인식하는 상태, 그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2시 13분에.
2.5
서서히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비도, 눈도, 먼지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벼운 입자들, 가까이 보면 은색과 투명 사이 어딘가의 색을 띠었고, 손을 내밀면 닿기 전에 사라졌다. 거리의 사람들은 우산을 쓰기도 하고, 멈춰 서서 그 느린 낙하를 바라보기도 했다. 세상이 숨을 고르는 순간 같았다. 소리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들리지는 않았다. 움직임도 명확히 있었지만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 속을 걷던 우리도 확실히 있었다. 단지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도, 말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발걸음 사이로 떨어지는 빛의 가루가 검은 도로 위에 닿았다가 바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문득 오래 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녀 역시 2시 13분이었다. 은빛도 하얀빛도 아닌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빛이 창문 틈 사이로 내려와 우리에게 잠시 머무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빛 속에서 그녀는 책을 펼쳤고, 나는 그녀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웠다. 스탠드 불빛 하나가 둘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드리웠다. 침묵 속에서 숨소리가 서로 겹치고 그녀가 첫 줄을 읽기 시작했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 단어들은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떠다녔다. 그 속도대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마치 시간을 잡아두려는 듯, 손가락으로 책 표지를 최대한 천천히 더듬었다.
문장은 현실과 겹쳤다. 그녀의 눈빛과 손끝, 머리카락 끝에 걸린 달빛 속, 가루 빛이 영화처럼 이어졌다. 손을 살짝 내밀었지만, 닿기 전에 멈췄다. 그 거리, 그 공기, 그 침묵 속에서 서로를 놓치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종이 소리가 방 안을 맴돌았다. 그 소리마저도 사랑했다. 잠시 책을 덮으면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말은 없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시간은 여전히 2시 13분이었다. 초침 소리도 없었지만, 빛과 공기와 우리의 그림자가 겹쳐진 이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책을 읽던 얼굴, 눈을 감을 때 내려앉는 속눈썹, 숨결이 닿는 공간, 손가락 끝의 온기.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빛의 입자들이 스치며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책을 들었다. 자리를 바꾸었고, 단어들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귀를 기울였고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서,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감각 자체로 충분했다. 페이지가 끝나고, 우리는 마지막 문장을 함께 읽었다. 책장 사이에서 작은 먼지들이 반짝이며, 남겨진 흔적처럼 공중에 흩어졌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 손은 이미 멀리 있었다. 조용히 웃었고, 그 웃음을 마음속에 담았다. 손끝에서 사라지는 빛처럼, 우리의 순간도 흩어졌다. 다시 숨을 들이쉬고 책을 덮었다. 그때의 2시 13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었지만 결코 붙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순간이 남아 있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빛의 입자와 말 없는 책 읽기의 시간 그 안에서 여전히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오늘 고요한 빛 속에서도 여전히 내 안에 살아서 숨을 쉬었다. 같은 빛, 같은 속도로 오늘과 다르게 누군가가 내 옆에 있었다.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한다. 2시 13분이었다. 시계 초침을 정확하게 인지했던 그 시간, 손목 위에 놓였던 작은 시계의 초침이 13분을 가리킨 순간, 창밖에서는 오늘과 똑같은 정체 모를 빛이 떨어지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 그 빛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모습을 보았다. 빛의 가루들이 창밖에서 흔들리며 눈동자 속에서 점멸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기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가 사라진 빛, 손을 뻗으려다 말고 멈춘 순간. 그리고 그 사이의 얇고 투명한 거리, 닿지 않았지만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리, 그 거리의 끝에서, 우리는 서로를 놓쳤다. 아무 말 없이, 예정된 끝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2시 13분을 함께 했다. 2시 14분으로 넘어가던 순간, 그녀는 천천히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이 마지막이라는 걸 깨달았다. 빛의 입자들이 방 안을 스치며 조용히 떨어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손끝에 닿았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처럼 말없이, 그렇게 작별했다.
오랜만에 그 빛이 눈앞에서 내리고 있었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저 서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빛의 가루들이 이제는 내 어깨와 머리 위로 내려왔다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기억의 그림자가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빛은 계속 내려오고 있었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말없이, 아주 천천히.
3
밤은 오래전에 나를 선택했다. 밤의 일은 낮보다 더 정직했다. 모든 움직임이 드러나 있고, 말의 낭비가 없었다. 기계는 같은 속도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그 속도에 맞춰 호흡한다. 내 몸도 그 리듬에 조율되어 있다. 심지어 피로가 쌓이는 방식까지 일정하다. 이곳에서는 나의 시간조차 빌려 쓰는 사람이다. 가끔 움직이는 것이 내가 노력한 결과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섭리 아래 이미 정해져 버린 파동이 움직이게 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누군가가 직접 바라보는 건 아니겠지만, 공기 안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눈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눈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다. 다만 존재한다. 조금만 머뭇거려도 그 뜬 눈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이곳의 시간은 단단하게 짜여 있다. 하루는 구획처럼 나뉘고, 그 안에서 나의 존재는 한 줄의 공정표에 맞춰 정렬된다. 쉬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 먹는 시간, 피로해지는 시간까지도 하나의 계획된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그 질서가 무너지면 세상은 흔들릴 것이다. 그 안에서 나를 접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부턴가 2시 13분이 되면 가슴 안쪽에서 파문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건 시계의 숫자일 뿐인데, 그 숫자가 눈에 닿는 순간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다. 기계의 리듬이 멎는 것도 아닌데, 모든 것이 잠시 숨을 멈춘 착각이 든다. 그 시간에 나를 바라본다. 그 누구의 리듬에도 속하지 않은, 잠잠한 사람으로 살아있는 듯 머물러 있다.
2시 13분은 내가 선택한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시각에 눈이 떠지고, 손이 저절로 핸드폰을 향한다. 빛나는 화면 속에서 숫자를 확인하면, 마치 세상이 나를 잠시 잊은 평온이 찾아온다. 2시 13분은 나를 구하지 않지만 그 시간만큼은 내가 아직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건 저항도, 자유도 아니다. 다만 내가 이 감옥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곧 기계의 소리가 다시 커진다. 철의 떨림과 냉기의 냄새가 몸에 닿는다. 세상은 다시 원래의 속도를 찾는다.
4
아침이 길어졌고, 시간이 선명하게 흘렀다. 사람들은 출근했고, 자동차의 행렬이 거리의 숨을 밀어냈다. 밤의 냄새가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옷을 입고 걷고 있었다. 밤은 사라졌지만 내 안에는 시간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2시 13분에 내가 바라보던 공기와 지금의 공기는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 자신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일터의 커피는 항상 같은 맛이었다. 거기에는 불평도 기대도 없었다.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사이에, 하루가 서서히 덮어왔다. 그 단조로움이 밉지 않았다. 그건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지구와 달이 매년 6cm씩 멀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점심시간의 햇빛은 칼처럼 똑바로 떨어졌다. 그 눈부심 아래에서 문득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라고, 어이없는 말을 했던 사람이 떠올랐다. 내가 사는 세계는 언제나 그림 밖에 있었다. 아무리 정확한 말을 찾아도 그 말이 내 하루의 온도를 닮은 적은 없었다. 말을 쓰는 일은 어쩌면 손으로 물을 붙잡으려는 일과 닮아 있었다. 흘러가는 것을 잡을 수 없으면서도, 계속 손을 내밀었다. 그게 당연하게 되었고, 언젠가부터는 믿음이 되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결코 완성되지 않으면서도, 그 불완전함 덕분에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퇴근길의 공기는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저녁의 냄새를 품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고 그 무더기들 안에서 빠져나와 아무 목적 없이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 흐릿한 구름, 그리고 도시의 소리들을 자각하며 그 속에서 나는 확실한 존재라는 걸 느꼈다. 누가 보지 않아도, 누가 부르지 않아도 이 시간 속에 속해 있었다.
밤이 다시 찾아왔다. 일터의 불이 켜지고, 공기는 식어갔다. 기계의 진동이 일정한 박자로 퍼졌다.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쳇바퀴 굴리는 햄스터 같은 시간 안에서 나를 들여다봤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시계를 보았다. 2시 12분이었다. 익숙한 긴장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잠시 후, 2시 13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슬픔도, 기대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걸 아무 의미 없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힐난하게 비판할지 모르지만 반복이라 말하겠지만, 그건 세상이 내게 제공한 유일한 인간적인 시간이었다. 아침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또 시간이 선명하게 흘러갈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을 때, 그 하루의 한가운데에서 언어로 붙잡을 수 없는 순간, 그 2시 13분이라는 톱니가 나를 삼키는 그 찰나에 내 이름을 지울 수도, 또는 다시 나를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5
2시 13분이었다. 밖으로 나왔다. 공기는 낮보다 무겁고, 공기는 겨울을 기다렸다. 하늘은 검게 젖어 있었고, 바람은 벽을 스치듯 지나갔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들의 잠꼬대를 들을 수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불빛이 내 손끝을 비추었다가 이내 어둠에 녹아내렸다. 길게 한 모금 빨았다. 그 연기가 입안에서 돌다가 목구멍을 타고 가슴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마치 문장 하나가 머릿속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러나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처럼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래전 책을 읽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책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창문 밖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였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의 호흡을 빌려 잠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일인지 미처 몰랐다.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문을 지나 세상은 달라졌다. 길을 걸을 때마다 다 읽어버린 문장이 곁을 머물렀고, 그때부터 문학을 믿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다. 혹은 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쓰는 순간 모든 게 흘러가 버릴까 봐, 사랑한 단어들이 한낮의 그림자처럼 없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바보다. 어찌 됐든지 지금은 펜을 들 수 없다. 삶이 구체적이어서, 언어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다. 남의 문장을 빌려 하루를 버틴다. 그 문장들은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그 약속 없는 진심이 좋다. 여전히 책을 사랑한다. 그건 어쩌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믿음 같은 것이다. 책 속의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외로웠고, 이야기를 남겼다.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는 몰랐겠지만, 지금 그 글이 내 손안에 있다는 게, 그게 나를 매번 살려냈다. 담배가 반쯤 탔다. 바닥에 떨어진 재가 바람에 흩어졌다. 재가 바람에 섞이는 걸 보면서 인간의 말도 어쩌면 저런 것일지 모른다고, 남에게 닿지 못하고,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았다. 입안에 쓴맛이 남았다. 피로의 맛이기도 했고, 진심의 맛이었다. 담배를 바닥에 눌렀다. 불씨가 짧게 빛났다. 그 빛이 꺼지자 세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단어의 숨결은 그렇게 간직했다.
하염없이 앉아서 꺼진 거리 위로 새벽이 기어 오는 장면을 포착했다. 하늘이 옅어지는 것 같더니, 곧 어둠이 밀려났다. 그 시간의 변화를 눈으로 느낀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나는 매번 기다렸다. 담배 냄새가 옷깃에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문질렀다. 식은 재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이었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하루의 흔적이었다. 하늘은 점점 푸른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새벽이 오면 모든 게 다시 이름을 되찾았다. 기계의 소리, 골목의 공기, 내 피로까지,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그 질서가 싫지 않았다. 세상이 돌아가려면,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했다. 나는 그저 그 역할을 맡은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다. 잠시 뒤, 동쪽 하늘이 붉게 번졌다. 퍼졌다가, 금방 희미해졌다. 잠시, 마음이 얕게 물결쳤다. 금세 잦아들었으나 그 자국은 남았다. 그건 후회도, 열망도 아닌 자각이었다. 문학과 작가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아직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깨달음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줄의 구름이 지나갔다. 정적이 흐르는 그 고요는 이상하게 어깨를 누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머리 위에 쌓였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를 끓이고, 시계를 보았다. 저 멀리 반대의 2시 13분이었다. 잠을 자지 못했지만 그 시간이 아직 내 안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잠들기 전의 한 문장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그 미완의 시간을 품은 채 하루의 시작을 맞았다. 그리고 일상이 돌아왔다.
6
커튼 틈 사이로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쏟아져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방 안으로 따스함이 스며들었고 바닥에 닿는 찬란한 빛을 바라보았다. 모퉁이마다 다른 속도로 환해졌고 서서히 물드는 밝음이 안심하게 만들었다. 책상 위에는 펴둔 책이 있었다. 문장 몇 줄이 밑줄로 그어져 있었지만, 무슨 뜻이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때의 마음이 아직 다 식지 않고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책갈피를 꽂고 책을 덮었다. 종이의 냄새가 희미하게 일었고 엄마 손을 붙잡고 들어섰던 서점이 떠올랐다. 처음 책을 좋아하게 되었던 날의 공기, 활자를 더듬으며 단어를 따라가던 눈길이 느릿하게 그렇지만 정확하게 되살아났다.
밖에서는 하루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멀리서 빵 굽는 냄새가 들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섞였다. 그 소리들은 서로 닿았다가, 금세 멀어졌다. 세상은 말을 통해 흘러가지만, 그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많은 것들이 머무르다 사라졌다. 책을 다시 열고,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낯선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좋았다.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그 문장이 남기는 여백이 소중했고 그 안에서 마음껏 수영을 할 수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있었다. 시계는 여전히 묵묵히 제 일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책의 모서리를 눌렀다. 그 작고 단단한 감촉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커튼을 열어재끼자 태양이 내 방안을 차지했다. 그 잔잔함을 그대로 두었다. 말로 옮기지 않고, 생각으로 붙잡지도 않은 채 그저 그 깊은 광의 기울기 안을 앉아서 지켜보았다.
하루가 길었다. 햇빛은 오후를 지나 저녁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책을 펼쳐 놓고도, 한 페이지 이상은 읽지 못했다. 활자는 여전히 자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선명했다. 글을 쓴다는 일은 어쩌면 단어보다 그 사이의 공기를 느끼는 일, 말이 닿지 못한 자리를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감히 짐작했다. 언젠가는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 생각이 다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막연함이 좋았기에 아직 닿지 않은 세계를 향해 느긋하게 마음을 열어나갔다.
2시 13분, 창을 열었다. 공기가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그 안에는 낮의 열기를 품고 있다가 저녁의 냉기와 함께 섞여 있었다. 그 불균형이 묘하게 편안했다. 책상 위에는 펜이 있었다. 그냥 놓여 있을 뿐인데도, 마치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그 펜을 잡지 않았다. 이렇게, 잡지 않은 채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글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시간이 언제든 찾아와 주면, 그저 손을 내밀면 될 것이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루가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무엇이든 아직 가능하다는 마음이,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그 사소한 순간이 의미를 갖고 있음을 바라보며 작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