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푸른 여름

by 무무

그 여름은 푸르렀다. 푸르다는 말이 색인지 시간을 말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짙었다. 무성한 녹음 속에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었고,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나무 그늘 아래서 시간을 보냈고, 더위를 피한다는 명목으로 중간중간 멈춰 섰다. 사랑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는데도, 그 여름을 통과하며 뒤늦게 무엇인지 가늠하게 되었다.


보통 사랑을 붉은색으로 인식했지만,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파랬다. 깊고, 쉽게 식지 않는, 단단한 뿌리 아래에 묻어두면 오래 남는 그런 색이었다. 우리는 말로 다 하지 못한 마음들을 그 여름의 흙 속에 묻어두었다. 언젠가 다시 꺼내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줄 거라고 믿었다.


시작하지 않을 것 같던 더위는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출근길에도, 저녁 무렵에도 공기는 줄어들지도 짙어지지도 않은 채 몸을 스쳤다. 고개를 들면 온 세상이 여름이었다. 어둑해지다 못해 거뭇해진 하늘 위에는 달 조각이 떠 있었고, 그 아래 가로등 불빛은 서서히 번져갔다. 빛마저도 쉽게 식지 않는 계절이었다. 그날의 공기와 냄새, 신호등이 바뀌는 속도까지도 모두 여름이었다.


수십 번의 더위를 지나왔지만, 눈을 감고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여름만이 떠오른다. 매미 소리와 먼 도로의 웅성거림, 늦은 밤에도 식지 않던 콘크리트의 온기, 다른 계절의 기억들은 서로 겹쳐 흐려지는데, 그 여름만큼은 살아있다. 여전히 푸른 채로 바래지지 않은 순간이었다. 누군가 왜 그렇게 여름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말을 고르다, 결국 당신을 떠올릴 것이다.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얼굴 하나가 먼저 떠오른다. 여름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계절 속에 있던 당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당신이 있던 자리마다 여름이 남았고, 나는 그 흔적을 계절이라고 불러왔다.


가끔은 푹신한 목도리를 두르고 눈 위를 걷는 겨울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생기고, 발자국이 또렷하게 남는 계절,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시간이지만 아직 그곳으로 가지 못한다. 계절은 다음을 준비하지만, 나는 한참 지난여름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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