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부모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성인이 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부모의 잔소리는 대체로 자녀가 올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길 바라는 부모는 없기에 대부분의 잔소리는 훈육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훈육의 특성상 반복을 피할 수 없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잔소리는 ‘쓸데없는 말이나 필요 이상으로 하는 훈육이 섞인 말’이다.
부모는 아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훈육을 시작하므로 잔소리는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본격적인 잔소리는 학교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로 보아도 무방하다.
내 아버지의 잔소리는 역사가 길다. 놀라운 사실은, 어릴 때부터 듣던 잔소리를 자식이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지치지 않고 계속하신다는 것이다. 본인의 생활방식을 자식에게도 강요하다 보니 자식과 대화하는 것보다 잔소리가 더 많다. 아버지와 만나는 날이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같은 이야기로 시작해서 잔소리로 마감하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나는 해가 갈수록 아버지와 만남의 횟수를 줄이고 있다. 강요와 잔소리를 가장 싫어한다고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전혀 듣지 않으니 내 감정이 상하지 않기 위해 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지치도록 듣고 어른이 된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강요의 잔소리’를 하는 낌새만 보여도 신경이 바짝 곤두설 때가 있다. 한국 사회의 위계 질서상 가장 서열이 낮은 며느리는 잔소리를 들어도 말대답하면 안 되는 시기가 있었다. 나의 시어머니는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많은 분이어서 자신의 요리법을 항상 며느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도라지 초무침은 고추장으로 하면 된다고 하시길래 나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고추장으로 해도 되는데 저는 고춧가루로 하는 걸 더 좋아해요.”
이 말은 시어머니를 노하게 만들어서 어른에게 말대꾸하는 며느리라고 무릎 꿇고 혼났다.
어른이 야단을 치시니 사과했지만, 무엇을 잘못해서 혼났는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말대꾸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의견을 자유롭게 말했지만, 어른들은 본인이 하는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날 이후, 시어머니와 나의 의사소통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좋은 분이지만 더 이상 내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고 안타깝지만, 안부를 묻고 걱정을 들어주는 것으로 관계 정리가 되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어야만 하는 관계에 대화는 불가능하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잔소리와 똑같다. 내가 듣기 싫었으니, 아이도 듣기 싫으리라 생각해서 나는 잔소리 없는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아이는 책가방 정리는 잘하지만, 방 정리는 기막히게 못 한다. 정리 안 된 침대 위는 입던 옷들이 쌓여있고 책상도 항상 어지럽다. 한 소리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도 있으나 하지 않는다. 정말 못 참을 만큼 정리가 필요하면 이렇게 한마디 한다.
“삐리리야, 네 방은 도둑이 이제 금방 왔다 갔구나.”
그러면, 아이는 씨익 웃으며 그날 안에 방 청소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교훈적인 훈계나 잔소리가 아이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부모가 교훈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아이는 입을 닫기 시작하고 심해지면 마음을 닫게 된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면 사춘기가 되어서도 마음을 닫아걸지 않는다. 성인이 되면 인생의 친구를 한 명 얻는 희귀한 기쁨을 누릴 수도 있다.
서로 존중받는 대화를 통해 아이를 키우는 경험은 부모가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의사소통은 어릴 때부터 연습하지 않는다면 어른이 되었을 때 그것을 개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개선이 되었다면 그것은 대부분 성인이 된 자녀가 그 상황을 참는 것일 뿐이다.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만날 때마다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시는 아버지와 이렇게 불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이별을 맞게 되는 것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