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첫날부터 결투신청
3개월 동안 내 자리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다. 돌아와보니 내 자리도 없고, 쓰던 전화 번호도 뺏기고, 심지어 노트북 마져 사라져 있었다. 사무실에서 비상용으로 신던 신발들은 내가 집에 가져가서 버린건지.... 아예 안 보이고 소박한 박스 한 개가 내게 남은 전부였다. 소듕한 키링과 마그넷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내 물건 하나라도 사라졌으면 오늘 여기있는 새끼들 다 뒤졌다 라는 마음으로 책상을 정리 했는데, 다행히 사라진 것은 없었다. 노트북 빼고...
노트북은 본부장 새키가 줌 회의 한다고 가져가서 쓰더니만 오전이 한참 지나서 돌려줬다. 회사에 노트북이 남아도는데, 왜 굳이 내꺼를 갖다가 썼는지 모를 노릇이다. 노트북을 준대서 갔더니만 6개월 쉴 줄 알았는데 3개월만에 돌아왔다고 격려인지 결투 신청인지 모를 말을 이죽거렸다. 왜 노트북을 도대체 가져갔을까 생각을 해보니까, 휴직 기간 중에 잠깐 예전 부서에서 내 노트북을 가져가서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또 내 거(=자기 거)를 가져가려고 하는게 싫어서 자기 자리에 놓고 Zoom 용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우리 본부원의 PC면 곧 자기꺼나 다름 없으므로.
아우 두야. 게다가 업무도 또 바뀌었다. 유튜브 편집 업무를 하란다. 그나마 다행인건, 유튜브는 본부장이 아예 터치를 안해서 앞으로부딪힐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선 번호도 맨 꼬래비 번호로 바뀌었다. 자리도 부서 막내가 앉는 자리고 다시 배정 받았다. 책상도 빼고 전화번호에서도 빼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굳이 따지자면 내 서열이 부서 2인자가 아닌 어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 정도로 내려갔으나, 어차피 그 이상의 대접도 받고 싶지 않으므로 이건 그냥 그러려니.
노트북을 돌려 받자마자 알코올로 박박 닦았다. 도대체 어떤 용도로 얼마나 썼는진 모르지만 너무 불결해서, 마우스며 전원 선까지 두번 세번 닦았다. 노트북을 켜 보니 휴직 전 설정해 놓은 네트워크 설정은 어떻게 된건지 다 사라져있고, 내부 프로그램은 하나도 접속이 안 됐다. 수십번의 재부팅과 업데이트를 거쳐 오후가 되어서야 복구 했다. 당장 생체 인식 등록하고 비번도 복잡하게 바꿨다. 혹시라도 월요일에 또 쓸 지 모르니까 금요일 퇴근할 때 아예 가져갈 생각이다. 맥북 이랑 그램 총 2개의 PC 쓰고 있는데 둘 다 가져가버릴거다. 어깨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본부장 새키의 손이 닿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렇게 시비인지 뭔지 모를 첫 인사가 끝난 뒤 본격적으로 동영상 편집을 시작했는데, 역시나 근본이 없었다. 보통 영상을 촬영할 때, 주제를 정하고 어느정도 콘티를 짠 후에 촬영을 하는데 여긴 그딴 게 없었다. 외부 전문가가 알아서 콘티를 짜서 편집점 없이 쭉 영상을 촬영해서 주면, 편집자가 알아서 자막 넣고, 그래픽을 넣고 하는 식이었다. 아니 라방을 할 때도 무슨 말을 할지, 뭘 할지 생각하고 하는데 이건 뭐.... 자유도가 너무 높으니 내가 또 열심히 해버릴까봐 그게 걱정이다. 첫 영상이니 천천히 하라길래 한달 정도 끌 생각인데, 일단 시작하면 내가 집중해버리고 말아서...
너무 개빡쳐서 휑한 책상 사진을 인스타에 올렸더니, 인친 겸 실친들이 댓글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욕설을 퍼부어 주었다. '개새끼네...', '일하지 말라는 거임?ㅋㅋㅋㅋㅋ', '딱 그 인간 수준이네ㅉㅉ' '가지가지라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거 같아요..' 그리고 어떤 친구는 힘내라고 카톡도 보내줬다. 마, 이게 내 클라스다! 너는 이런 친구 있냐?? 너는 막 사람들이 너랑 밥 먹기도 싫어하고, 피하고 그러지?? 알고 있냐? 너 출근 안하면 직원들 다 방학인거? 나는 놀자고 하면 만나주는 친구도 있고, 나랑 같이 니 욕해줄 친구도 있다! 친구들이 나랑 있으면 재밌어 죽겠다고 하지롱!! 니 앞에서 사람들 눈만 웃고 입으론 쌍욕하는 거 마스크 때메 너만 모르지? 으이구.... 불쌍한 새끼. 휴가 쓰고 골프 치러 갈 친구도 없으니 맨날 회사 나오고, 남은 연차를 보며 열심히 일했다고 자위하는 새끼. 야근할 일도 아닌데 괜히 남아서 법카 쓰곤 열일했다고 개생색 내는 새끼. 노무사 시험 보는 것 같던데 어디 독서실이라도 끊고 거기 가서 공부해라 제발. 여러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투사적 동일시' 라는 게 있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방어기제에 일종이라고 한다. 실제로 화 난건 자기 자신인데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할때까지 난리를 치고, 상대를 통해 원하는 감정을 얻고 만족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화를 내는 사람은 자기가 왜 화를 내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상대가 자신의 분노를 내게 투사한 것인데, 그걸 까먹고 그냥 화가 난 상태가 된 것이는 것이다.
첫날부터 난 선빵을 맞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은 그냥 모든 사람을 화나게 하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선빵을 치고 다니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 사람을 애써서 이해해 줄 필요는 없지만, 그 사람이 투사한 감정을 내가 소화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런 사람들한텐 역시 '빙썅'이 최선의 방어 전략이다. "에구 ^^ 죄송해요 ^^ 제가 몰라서 ^^ 못해서 ^^"
아무튼 첫날부터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복직 첫주였다. 금요일이 되니까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왔다. 영상 편집 자체도 힘들기도 하고, 그냥 출퇴근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5월에 또 조직개편을 한다고 해서 약간 김칫국을 한모금 마시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한다면 계속 견딜 수 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탈출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럼.. 오늘도 무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