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루팡, 아무나 될 수 없다

개인이 먼저일까? 조직이 먼저일까?

by 케일린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예전에 어느 방송사에 연봉 1억이 넘는 부장님이 모니터링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하루 종일 TV만 보다가 퇴근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땐 진짜 그런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내가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사람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나 보다. 당시에 난 옆에서 보면 진짜 속 터지겠다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 부장님 못지않은 월급루팡의 하루를 실시간 생중계로 매일 보는 지금, 과거의 나에게 그렇게 남일처럼 말하지 말라고 꿀밤 한 대 먹이고 싶다.


월급루팡이 처음부터 월급루팡이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일이 많다는 핑계로 후배를 들였다. 상사가 바뀌면서 업무확인이 느슨해졌다. 그러자 업무분장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업무를 후배에게 다 미뤄놓고, 월급루팡의 길로 들어섰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자리는 지키면서, 열심히 딴짓을 하고 있다.



월급루팡의 하루를 소개합니다.

월급루팡의 하루는 대충 이렇다. 눈에 띄기 쉬운 근태 지적을 피해기 위해, 출퇴근은 정확히 9시, 퇴근은 6시에 한다. 출근을 하면 일단 오전에 티타임을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갖는다. 1시간 정도 뭘 하나 싶더니 11시 반부터 12시까지는 점심시간만을 기다리면서, 휴대폰을 보면서 시간을 죽인다.


점심시간이 지나 느지막이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다시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다. 오후 3시쯤 되면 1시간 정도 산책하러 나간다. 이제 퇴근까지는 2시간이 남았다. 시선을 45도 아내로 하고, 모니터가 아니라 휴대폰을 보는 것이 기본자세인데, 중간중간 모니터를 보는 것 같아서 지켜보면, 카톡을 열심히 하고 있다. 6시가 되면 칼같이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타고난 걸까? 환경 탓일까?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월급루팡은 타고난 걸까, 아님 환경 탓일까. 각 사무실의 월급루팡마다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기에, 그 발생 이유를 섣부르게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내 눈앞의 월급루팡의 사례에 한해서 따져보면, 타고나는 쪽이 훨씬 크다는데 한 표를 던져본다.


사무실의 월급루팡은 불법으로 신작 영화나 영상 콘텐츠를 공짜로 볼 수 있는 사이트를 꿰고 있다. 심지어 누가 요즘 돈 다 주고 보냐면서, 돈 내고 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모자란 사람 취급하기도 한다. 제 돈 내고 정식으로 하는 것보다는 인맥과 자신이 아는 어둠의 루트를 이용해 한 푼이라도 아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법인카드를 쓸 때도 익히 알려진 인원 부풀리기, 영수증 쪼개기 등 온갖 편법에 통달한 건 당연한 처사.


일을 할 때도 친분에 따라 업무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만, 자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무관심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업무도 대충 해서 넘기곤 했다. 흔히 말하는 우리가 남이가 마인드였다. 우리와 남의 경계가 명백하고, 우리가 아님 남에게 가차 없었다. 아는 형님에~ 아는 누나에~ 아는 동생에~ 를 외치는 99대장 같다고나 할까.


어느 순간 조직의 관리가 느슨해지고, 제대로 된 업무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걸 파악한 월급루팡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계획된 일을 다 하지 않아도 월급은 그대로 받을 수 있었고, 잘한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받는 돈이 같다면, 최대한 일을 덜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펴소 사는 방식대로. 이 정도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잘 살펴보자. 다들 어느 정도 적당히 속고 속이면서 살고 있는데, 순진한 게 잘못 아냐?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는지. 적당한 습도와 그늘만 갖춰지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곰팡이처럼 언젠가 월급루팡의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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