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스마트폰 없이 떠난 마지막 여행길은
얼마 전, 컴퓨터 폴더에서 10년도 더 전에 떠났던 이베리아 반도 여행길에 찍었던 사진을 발견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여행길에서 느꼈던 감상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직장생활이 예상치 못하게 끝나면서, 조금은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마지막 사무실에는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짐승이 있었다.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병명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규정짓는 건 지나친 일반화겠지만, 사무실에서 보여준 행적만큼은 그 특성으로만 정의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교묘하고 폭력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는 비난과 지적에 노출되는 시간과 빈도가 늘어갔다. 마음의 여린 살갗이 짓물러 피가 흘렀다.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혹독한 채찍질이 가해졌다. 결국 원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에야 탈출을 결심할 수 있었다.
어딘가에 매인 세월이 오래되었던 탓일까.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갈 곳을 잃은 채 그저 가만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이때가 아니면 멀리 떠나기 힘들 거란 직감이 들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20대 초반, 유럽 배낭여행에서 유일하게 발을 내딛지 못한 지역. 그래서 아쉬움이 남았던 이베리아 반도에 가기로 했다. 어딜 가고 싶다는 욕망보다 가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의 크기가 더 크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자유의 몸이 된 나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급하게 찍고 다니는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다. 스페인 내에서는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육로로 다니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에는 몰랐다. 스페인의 작은 버스터미널에는 요일 표시도 영어 없이 스페인어로만 되어있을 줄은.
그 당시 쓰던 휴대폰은 2G 폴더폰이었다. 혹시 몰라 집에 굴러다니던 갤럭시탭 초창기 모델 하나를 들고 오긴 했다. 하지만 유심 없이 와이브로라는 한국 토종기술이 적용되어 있었기에,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곳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여행길에 동행하게 된 일행과 만나기로 한 숙소에서 길이 엇갈렸는데도, 바로 연락할 길이 없어 숙소에 도착한 후에야 와이파이로 스카이프를 연결하여 겨우 연락을 한 적도 있었다. 스페인어로만 적힌 버스 시간표를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다음, 숙소에 와서 검색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미 아이폰이 국내에 상륙했던 2011년. 시대에 뒤처진 기기를 가져온 건 불편함을 입은 행운이었다. 숙소를 벗어나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쓸모를 잃은 액정에서 풍경으로 향했으니까.
바르셀로나에서 발렌시아까지 기차로 이동하면서는 따사로운 햇살에 부서지는 윤슬에 눈을 뜰 수 없었던 바다풍경을 지겨워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육로를 따라 시에라네바다 산맥으로 이동하던 길에는 토양의 색이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에 넋을 잃기도 했다. 붉은색에서 흰색, 심지어 푸른색으로 다채롭게 변하는 흙의 빛깔은 자연이 아니면 빚어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베리아 반도 여행을 마지막으로, 여행길엔 항상 스마트폰이 함께 한다. 여행은 더욱 편해졌지만, 여행지에서 느꼈던 짜릿함과 설렘은 훨씬 줄어들었다. 스마트폰 화면은 순식간에 나를 일상으로 되돌려 보내고, 비일상이 주는 낯섦을 휘발시킨다.
수많은 여행 중에서 한 달간의 여행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 건, 일상에서 완전히 떨어진 거리감을 느꼈던 마지막 여행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