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도, 평생직장도 없는 직장인에게 필요한 건
어떻게 하면 잘 내려갈 수 있을까
얼마 전, 신조어 트렌드 테스트를 해봤다. 어찌어찌 찍다 보니 2/3 이상 맞췄다. 트렌드에 민감하군요~라는 문구를 보는데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실제로 보고 듣고 쓰는 밈과 짤을 떠올리면서 풀었겠지만, 이제는 최신 마케팅 트렌드를 다루는 뉴스레터를 밑줄 치며 읽고 배운 내용을 조합해서 겨우 맞췄기 때문이다. (다행히 너 T야? 는 알고 있었다.) 뒷방 늙은이로 밀려나는 느낌에 혀끝이 씁쓸했다.
이제 갓 40줄에 들어선 사람이 어떻게 잘 내려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면 코웃음 칠 분들도 많을 거다. 아직 한창인데 벌써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그럼에도 고민을 멈출 수 없는 건, 갈수록 연차 낮은 직원들과의 격차는 벌어지고, 꼰대라고 불리는 사람들과의 싱크로율을 나날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는 빠르게 변해 가는데, 몸도 마음도 예전만큼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기 어려워진다. 정년이 무색해진 상황에서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일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간다.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이자 아이들에게 부양의 의무를 기대할 수 없는 세대. 평생 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이 등에 업혀있다. 월세 나오는 오피스텔, 배당주, 자동화된 수입 파이프라인 만들기와 같은 영상이 뜨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생존이 아닌 존엄을 위해
몇 년 간의 펀드와 주식 삽질 속에서 깨달은 건 나에게 재테크로 큰돈 벌만큼의 재주도 담대함도 없다는 거였다. 투자는 계속하겠지만, 수익률을 아무리 높게 잡는다 해도 재테크에만 의지해서는 기나긴 노후를 버틸 수 없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영원한 승자도 없고 소수의 승자만이 살아남는 자본 시장에서, 그저 불면 날아갈 가벼운 주머니로는 안정적인 노후를 마련할 자금은 담기 어려워 보였다.
재테크가 답이 아니라면, 이제는 60을 넘어서 80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문직이라는 간판은 굴레일 수도 있겠지만, 안전벨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저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직장을 나가는 순간 명함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지금 나는 시장에서 선택받을 만한 가격경쟁력과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고유함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네'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단순히 노후 생존을 위해 일을 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은퇴 후,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 의미 없이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다. 나이 들어서도 뭔가를 생산하며,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보람을 느끼고 싶다. 그저 나이만 먹은 사람이 아니라, 배울 것이 있고,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일하고 싶었다.
조기 은퇴를 선언했다가 다시 직장으로 복귀하거나, 다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에 대해 말한다. 목표를 향해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끌도 없이 나태해지거나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다가 다시 업의 굴레를 기꺼이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경제적 자유가 있다는 건 좀 많이 부럽긴 하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들 속에서
월급루팡도 한 번쯤 노후에 대해서 생각해 봤을지도 모른다. 일단 여유롭게 다니면서 정년을 채우는 걸 기본으로 깔고, 노후 고민은 10년 후나 20년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님 재산을 물려받으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월급루팡은 알까. 돈을 비롯하여 나를 둘러싼 외부 요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돌변할 수도 있고, 썰물과 밀물처럼 왔다가 갈 수도 있다는 걸. 그러나 내 안에 쌓인 것은, 내 손에 익은 것은 변함없이 내 곁에 머문다.
노후에 계속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하지만, 아예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 줌도 안 되지만 어느 정도 손에 쥔 것도 있고, 에너지는 부족한데 신경 쓸 곳은 많아졌다. 지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조금씩 옆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뿐. 지금 하는 일을 더욱 깊고 진하게 하면서, 조금씩 관심사를 넓히고 나의 경험과 연결 지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다.
주의할 건 꼭 일을 해야지만 존재가치가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거다. 자칫 나이 들어서도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할 줄 알아야 한다거나, 각자 노후를 준비할 것이지 왜 국가가 개인의 노후를 왜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식의 논리로 흘러가는 건 경계한다.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능하다는 낙인을 찍고, 1인분도 해내지 못한다며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능력주의도 단호하게 배척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도 처한 환경도 다르다. 국가는 개인의 역량만큼의 역할과 의무를 요구하고, 국민은 그에 맞는 혜택을 누리고 책임을 지면 된다. 스웨덴이 소득에 따라 지급하는 보조금과 부과하는 벌금의 액수가 다르듯이,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깔아 능력과 관계없이 노후에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을 누리도록 하는 건 국가의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