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화요일)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봄비라고 하기에는 스산한 바람을 동반한 차가운 비였다. 화요일은 내가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이다. 지난주부터 일회용 마스크를 버리지 않고 재사용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분은 없다. 오늘은 꼭 마스크를 사야 한다.
오늘은 마스크 구매 전에 동네 약국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 접속했다. 약국에서 매일 마스크를 판매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사전에 판매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오늘 공지는 어제와 달랐다. 어제는 마스크 판매 시작 시간을 공지하지 않겠다는 공지문이 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11시부터 약국 앞에 줄을 선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배포하겠다는 공지문이 올라와 있다. 오늘은 특별히 비가 오는 관계로 줄 서는 사람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마스크 판매를 위한 번호표 배포 시간을 공지한다고 한다. 어제 공지문에 마스크 판매시간을 공지하지 않는 이유로 약국 앞에 줄을 서서 마냥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차피 오늘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데, 마스크 판매시간 공지와 공지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
블로그 접속 방법을 모르는 분들이 아마 불평하셨나 보다 짐작한다. 그래서 블로그에 마스크 판매 개시시간을 공지할 수 있는대도 모두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형평성을 추구했구나 싶었다. 나는 블로그를 확인한 후, 10시 15분 조금 넘게 약국에 가기로 했다. 마스크 배급제가 시행되어 오늘이 아니면 마스크를 구매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다.
10시 조금 넘어 집에서 출발했는 데, 약국 앞에 도착해보니 벌써 10여분이 우산을 들고 대기 중이시다. 연세가 제법 들어 보이는 분들이 많았다. 이 분들이 아침 일찍부터 우산을 쓰고, 줄을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니 짠하다. 이 분들은 평일 오전 10시 이전에 약국에 나올 수 있는 분들이다. 직장인은 아니실 듯하고, 아마 은퇴하신 분들이거나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 시간제로 근무하시는 분들일 것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소나타 자동차를 타고 약국 옆을 지나가시는 한 분이 소리치신다. '요 앞 약국에 가면 줄을 서지 않고도 마스크 살 수 있어요! 요 앞으로 조금만 가면 됩니다!'라고 전한다. 줄을 대오가 순간 흩어졌다. 앞 서 줄 서 있던 몇 분의 우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마스크를 사고 집에 가는 게 낫겠다 싶은 분들 이리라.
나도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나는 오늘 우산 없이 그냥 비 옷만 입고 나왔다. 계속 비를 맞고 여기 줄에 서있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나도 빨리 구매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빗 속에 열심히 뛰었다. 혹여 다른 편에 있는 약국에서 마스크 판매가 종료됐거나, 차에 탄 아저씨가 잘못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면 낭패다. 얼른 뛰어서 다시 이 곳 약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에 앞서 대열을 이탈한 한 무리의 사람들도 바삐 움직였다.
잔 걸음으로 뛰어 도착한 약국은 내가 어제 이미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약국이었다. Naver 지도에서 본 그 위치에 바로 약국이 있어 다행이었다. 단지 어제 Naver로 찾았을 때는 자체 블로그는 운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스크 판매 여부도 확인하지 못했던 약국이었다.
급하게 약국에 들어가니 마스크를 사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 데, 줄이 보이지 않았다. 담당약사에게 '마스크 있어요?'라고 물으니, 이미 판매 종료란다. 지금이 10시 30분이 조금 지났는 데, 이 약국에서는 9시부터 판매를 시작했고, 오늘 판매분 250장이 모두 판매 완료된 상황이라고 전한다.
'아~ 오지랖!' 아까 그 자동차 타고 가시면서 이 약국은 줄 안 서도 마스크 구매가 가능하다고 말하시던 아저씨가 야속했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줄도 안 서고 이 약국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마스크 구입에 성공한 분이라고 믿기로 했다.
비도 오고 마스크 구매도 실패하고 해서 근처 편의점에 들러 4500원짜리 일회용 비닐우산을 구매했다. 우산을 써야만 할 것 같았다. 다시 종종걸음으로 약국으로 돌아왔다. 줄이 길어지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데, 내가 구매한 우산이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투명 우산 아래에서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다. 빗물이 동글동글 맺혀 내려온다. 그리고 그 소리도 우산 아래에서는 증폭되어 들린다. 재미있는 소리와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자연이 만들어낸 장난감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우산 보는 게 더 재미있다.
10시 50분이 넘어가니 젊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리 일찍 와서 줄 서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젊은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마도 125명 분의 마스크가 있고, 마스크 판매가 요일제로 시행되니 마스크 수요가 분산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싶었다. 나만 너무 꼰대인가?
제품도 디자인할 수 있듯이, 사람들의 행동도 디자인할 수 있는 시대다. 사람들의 행동을 디자인하는 분야가 바로 '서비스 디자인'이다. 드라이브 스루 COVIC-19 선별 진료소가 우리나라에서 만든 최초의 서비스 디자인이고, 이 서비스는 해외 수출도 가능하다. 도구 개발을 통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디자인한 대표 사례다.
우리는 일상에서 행동 변화의 필요를 느낄 때 도구를 만든다. 내가 몰입하고 싶을 때, '몰입 시계'를 디자인한다. 약국 앞에 줄 세우기 위해서 '오늘 마스크는 11시부터 판매합니다'라는 도구를 만든다. 마스크 판매 장소를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말라고, 마스크 판매 장소를 알려주는 도구를 만든다.
서비스디자인의 목적은 행동 양식의 변화다.
일상에서 자기자신의 행동양식을 바꾸기 위해 도구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사람이 곧 서비스 디자이너다.
다른 사람의 행동 변화에 관심을 갖는 것도 서비스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이다.
사람들의 행동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행동은 곧 그 사람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나는 좋은 서비스디자이너가 되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행동 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잘 된 도구를 통하여 사람들의 행동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겨하면 된다. 그것이 좋은 서비스 디자이너의 기본 자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