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평] 안나 까레리나 I

톨스토이 지음/최선 옮김, 창비 2019

by 독서백일

어떻게 하루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정말 다 읽어버린 책이다. 톨스토이의 명작 고전 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이 책이 언제 초판이 나왔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는 1874년이라고 하고 책에서는 1877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1928년 생이므로, 그가 거의 인생의 반을 산 50세 가까이에 쓴 책임에는 틀림없다. 이 책을 통하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반 백 인생을 산 톨스토이의 고민과 연민을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부터 이 책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등장인물이 처음부터 많이 나왔고, 등장인물도 참 많이 나왔다. 처음에는 노트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 들의 관계도를 그려서 이해하며 읽어나가야 할 정도였다.


아! 그런데 안나가 등장했다. 처음에 난 ‘안나’가 그 ‘안나’인 줄 몰랐다. 그냥 주인공의 여동생쯤으로 잠깐 오빠의 사생활 문제를 해결하려 등장하는 조연급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안나’가 유명한 ‘안나 까레니나’라는 것을 안 순간, 와~ 정말 서두가 긴, 복선이 길게 깔린 옛 소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그동안 내가 주로 읽어왔던 전문서적과는 다르게 문학을 다루는 책이다. 그런 장르답게 정말 상황 묘사의 디테일 감이 뛰어났고, 상황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창의적/감성적 뇌 사용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었다. 읽고 있는 모든 상황의 디테일을 눈 앞에 보이듯 그려야만 전반적인 앞 뒤 내용이 이해가 되는, 그런 방식의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중간 정도 읽었을 때, 2013년도판 안나 까레니나 영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디테일이 정말 궁금하기도 했고, 내가 상상한 세계의 모습과 진짜 모습이 얼마나 다를 지도 궁금했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은 과연 ‘안나’는 어떤 모습일까? 브론스끼의 모습은? 이런 점 들이었다. 무도회장에 나타난 ‘안나’의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브론스끼의 눈. 이런 것들은 상상이 되지 않았던 장면이다. 이 장면을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면 왜 마다하겠는가?

책의 절반 정도만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맞을까? 위험한 일이기도 했지만 이 경우에는 반드시 옳았다. 책 속의 상황이 디테일한 표현과 함께 영화 세트로 모두 보였다. 다른 문화권에 속한 나에게 안나 까레니나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실히 넓혀주었다. 눈 앞에 펼쳐진 눈 쌓인 모스크바 _ 아 안나가 사는 곳은 이런 곳이었구나를 확실히 느끼는 순간, 책의 내용이 확 와 닿는 부분이 많았다. 책에서 디테일하게 표현되었던 상황과 등장인물의 대사 하나하나가 당시 시대의 맥락을 시각적으로 보니 훨씬 더 이해가 쉽게 되었다.


나는 안나 까레니나 I 권 밖에 구입하지 않아, II권은 아직 읽지 못하고, 이 서평을 쓰고 있다. 아마 II 권에서는 안나 까레니나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브론스키의 삼각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화에서 처럼 아마 안나 까레니나의 감정 변화를 아주 많이 보고 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뜻 구매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 이미 영화에서 내용을 안 이상,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서 구매를 미루게 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아마 내가 비극을 싫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비극적인 삶을 산 안나 까레니나를 한 번 본 것으로 충분하다. 책으로 다시 안나 까레니나가 그 시대에 느꼈던 소외감, 외로움, 두려움 등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당분간.


영화를 보다 보니, 영화는 책의 많은 부분을 생략했고, 어떤 부분은 너무 과장했고, 표현하기도 했구나를 알게 되었다. 각색이겠지. 하지만, 이번 영화는 분명 책을 함께 읽어야 맥락적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반드시 책을 함께 읽고 영화를 감상할 것을 추천한다.


책을 읽고, 또 다른 곳에서 쓰인 책의 서평을 읽고, 영화도 보면서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했던 ‘좋은 인생’이란 과연 어떤 삶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겉으로는 유쾌하고 유복하고 본인이 선택한 삶을 사는 안나와 시골에서 혼자 외롭지만 착실하게 사는 레빈의 삶을 비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좋은 삶’이 꼭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닐까? 마치 레빈의 삶처럼. 그저 내적으로 충만하고 외적으로 베풀면서 사는 삶도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현대 기술문명과 SNS에 둘러싸인 현대인들에게 ‘조급증’이란 병이 있다. 둘러보면 모두 화려한 인생을 사는 것 같고, 나 만 낙오된 삶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잘 읽다 보면, 안나 까레니나가 등장하는 그때 사교계의 삶이 바로 우리가 사는 SNS 세계와 많이 비슷함을 알게 된다. 화려하고 조급증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런 삶 말이다. 그 당시 작은 집단 모임인 사교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대로 SNS 상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하지만 비난과 뒷이야기가 풍성한 그 인간의 세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주 예전에 쓰였지만, 지금 SNS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자연’, ‘배려’, ‘봉사’의 가치가 1800년대 후반에도 ‘좋은 삶’의 가치관으로 부각되었지만, 이 가치관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결코 낡은 ‘가치관’이 아닐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의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이렇게 집에서 100일 독서에 빠져있는 나.. 괜찮은 삶이겠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서평] 최강의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