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미팅을 할 때면 가끔 지나치게 딱딱할 때가 있다.(내 근육만큼이나.) 얼마 전 미팅에서도 그랬다. 한참 대화를 주고받은 후에서야 사적인 질문도 주고받았는데, 내가 부산 출신이라니까 깜짝 놀라워했다. 자기가 이태원 토박이인데 100% 서울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때 그 이태원 토박이님이 놀라서 동그랗게 뜬 눈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건 진실의 눈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나의 서울말 구사가 이제 완벽에 가까워졌다는 강력한 근거가 됐다. 이제 다른 사람 말은 안 듣는다. 후후.
서울에서 지낸 지 16년이 지났고, 그간 명절에 부산에 가더라도 2,3일 남짓 머무는 게 다였다. 이번 출장처럼 2주 동안이나 머물렀던 것은 16년 만에 처음이었다.
부산에 내려오자마자 마주친 부산 사내들은 하나같이 금목걸이를 차고 있었는데, 그중 친절한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은 서울 남자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이상한 기세 같은 것이 있었다. '이게 뭐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제야 떠오른 단어가 ¹'우빵'이란 단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단어 외엔 마땅히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다.
예전 어떤 모임에서 자칭 ²부산 해이터라는 L님을 만났던 것이 생각난다. 그 모임에서는 (이미 이태원 토박이님한테 인정받은 이후라) 나름 자연스럽게 서울말로 대화를 이어나갔는데, L님은 귀신같이 내가 부산 출신임을 알아챘다. 비범하고 비범한 친구임이 틀림없었노라. 그는 어렸을 때 부산에 잠시 산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던 부산 남자애들이 그렇게 허세, 허풍을 떨었다는 것이다. 부산 남자애들의 특유의 그것들이 그렇게 싫었다면서 맹비난을 쏟아부었다. 그에게 부산 남자는 회생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모임의 다른 사람들이 “그래도 부산 남자들이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겠냐”라고 반문했는데, 그는 단호히 아니라고 했다. 부산 남자들은 모두 그렇다고 했고, 태생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고, 뽈쭘하게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곤 그렇다고 양국님이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그래 나 서울 사람이다...
이번 출장으로 그때 L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어느새 서울의 정서를 가지고 부산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부산 남자가 가진 그것이 허풍, 허세라기보다는 위신이나 체면 정도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이유로 부산 남자들은 운전할 때 끼어들기를 잘 못한다. 뒤차에 대한 미안함보다 이런 얌체 같은 짓을 했다는 굴욕감을 더 크게 느낀다. 그렇다고 끼어드는 차에 대한 포용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용납 못한다. 한편 서울 사람은 미안하게 느끼긴 하지만 급할 땐 끼어들기를 주저 없이 한다. 체면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편이다. 자신도 가끔 끼어들기 때문에 간혹 끼어드는 차에도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이번 부산 출장에는 차를 직접 몰고 내려왔는데 부산 표지판을 본 순간부터 울리는 클락션과 하이빔이 "디스 이즈 부산"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차선 변경을 쉬이 허용하지 않는 도시 부산, 끼어들려는 찰나 차들은 공간을 좁힌다. 그 뒤로 들어가려고 해도 앞차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뒷 공간을 메어주는 친절함까지 보인다. 날렵한 운전 실력으로 슬쩍 끼어들기를 성공했는데, 어찌나 하이빔을 쏘아대던지 난 뜻밖에 화려한 조명을 감싸 안으며 금의환향하는 기분을 누렸다. 중간에 다른 길로 접어들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트렁크랑 뒷좌석이 녹아 없어져 버릴 뻔했다.
부산 남자들은 패션에 관심이 많다. 다소 획일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화려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부산에서는 ³깔롱부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보통 남자들에게 사용되는 말이다. 부산 남자들이 겉으론 센척하지만 알고 보면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다. 이 모든 걸 알고 손바닥 위에 놓고 보면 부산 사내도 꽤 귀여운데, 그렇지 않으면 부산 해이터가 될만하다.
부산에 머물게 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부산에서 브랜딩, 디자인, 기획 관련된 모임을 만들어보면 재밌겠단 생각을 했는데, 그 이전에 먼저 이태원 토박이님도 인정한 ⁴서울말 클래스부터 열어야겠다. 그리고 이들에게 서울의 정서를 전해야겠다. 그때의 L님처럼 부산 해이터가 또 더 생겨나기 전에.
난 부산 러버니까.
주석
¹ 자기의 능력이 미치지 못함에도 허풍을 내세우는 것
² 부산 남자를 싫어하는 사람
³ 멋을 부리다.
⁴ 참여하고 싶으신 분 DM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