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아버지와 함께 늘 새벽 산책을 한다. 오늘은 바람이 분 날.
산책을 할 때는 아버지와 대화를 하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한 시간 동안 묵묵히 걷기만 한다. 그럴 땐 혼자 사색에 잠기곤 하는데 전날에 있었던 토픽이 사색의 주제가 된다. 가령 슈어 라운지에서 손님이랑 있었던 일이나, 전날 봤던 영화나 책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 편의 글이 되기도 한다. 이 글도 그렇게 쓰여진 글이다.
날마다 산책을 하다 보니 특이한 분들을 몇몇 마주치는데, 난 그들을 “산책로의 ¹빌런들”이라고 부른다.
매일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시는 분.
²나무를 부둥켜안고 몸을 계속 부딪히는 분.
스피커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운동하시는 분, 늘 찬송가를 들으시는 분이 계신데 한 번은 맞은편에서 불교방송을 들으시는 아줌마와 교차되면서 목탁 소리에 찬송가 화음이 얹힌 것도 들을 수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키는 멀대같이 큰데 다리의 보폭은 좁고 발을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며 러닝을 한다. 그 형상이 마치 누군가에 쫓기는 좀도둑 같달까? 왠지 잡아채고 싶은 뜀박질이다. 가끔 뛰다가 뒤돌아보는데 그것이 킬포인트.
그리고 왼편으로 걷는 아주머니 vs 오른편으로 걷는 아저씨, 언제 한번 이 두 분이 마주 보고 걸어오다 서로의 길을 막아서 크게 한판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대망의 끝판왕, 세 걸음 걸을 때마다 가래침을 뱉는 아저씨가 있다. 다른 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분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괜히 끼어들어 이 분의 하루를 망칠 수도 있으니까, 내 특기인 ³서울말을 보태어 최대한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어르신, 날씨가 참 좋죠? 음 죄송하지만 여기 다들 산책하는 길인데, 가래침 뱉는 거 조금 자제해주시면 안 될까요?”
어르신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실패다.
서울말이 안 통한다.
그래도 다음 날부터 어르신은 가래침을 뱉지 않으셨다.
아마도 매일 아버지와 운동을 나오는 나를 효자라 생각하고 좋게 보신 모양이다.
오늘도 누가 트로트를 스피커로 우렁차게 틀어놓고 요가를 하고 있다. 가끔 이럴 때 에미넴의 ⁴without me를 나도 크게 틀어볼까? 충동이 일기도 하지만 이내 달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 가끔 달이 이렇게 예쁘게 보일 때는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다시 바쁘게 걸어 아버지 뒤를 따라붙는다.
영화 러브픽션에서 주월은 희진에게 사랑해라고 하지만 희진은 시시해한다.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는 말 말고,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줘.”
그러자 주월은 테이블 위에 있던 방울토마토를 보고 “난 너를 방울방울해”라고 한다.
"난 너를 방울방울해."
만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이 제목도 사랑해라는 말 대신해 마음을 전하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만든 말이 있다. 나만의 언어.
달을 좋아해서 만든 말.
"나는
너를
달달해."
영어로 하면
I moon you.
사랑한다는 의미라기보다,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어. 그쯤인 것 같다.
나는 오늘도 I moon you.
주석
¹ 나쁜 의미가 아니다. 캐릭터가 강하다는 뜻으로.
² 등을 부딪히는 건 괜찮은데 배를 부딪히는 형국은 아침에 보는 풍경치곤 쪼금 아찔하다.
³ 서울말 편 참고
⁴ 왠지 트로트를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