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by cakes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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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새치기를 당했다. 나는 새치기를 하고 싶게 생긴 얼굴이다.



새치기하는 사람, 지하철에서 다리 꼬고 앉는 사람, 길을 걸어가며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이 이야기에 지하철에서 다리 꼬는 사람도 나쁜 사람인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 한 사람이 있다. 소개팅을 위해 새 옷을 입고 나왔는데 다리 꼬고 앉은 발에 닿여 옷이 더러워진다면, 하필 소개팅 상대방이 옷이 더러운 걸 지극히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소개팅을 실패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된다면,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다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다른 사람 팔꿈치에 명치를 맞는다면, 혹은 다리에 걸렸지만 안 넘어지려고 하다가 호랑나비 춤을 춘다면,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다행히 그 다리를 잘 피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리를 피한다고 진을 빼서 정작 중요한 일에는 힘을 못 낼 수도 있다. 이것이 한 사람에게는 작은 일이지만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다면 인류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인구는 줄어들 것이고 세상은 전쟁으로 얼룩질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들로 인해 인류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오늘도 다리를 꼬지 않고 앉음으로써 지구를 구원한다. 그러니 인류에 위협을 가하는 빌런이 되지 않으려면 지하철에서는 다리를 꼬고 앉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생각보다 많이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난 왜 이런 기분 나쁜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가’란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내가 이들을 바꿀 수 없다면, 나는 이들을 좀 더 너그러이 포용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꽤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는데 명쾌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려 할수록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깨달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이해하려 하는 것을 멈췄을 때 비로소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에서 세이모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갈등과 즐거움이 함께 있고, 조화와 부조화가 공존하죠. 그게 삶이에요. 벗어날 수 없어요."

거시점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런저런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조화와 부조화가 공존하는 게 디폴트인 세상을 두고, 내 눈앞의 부조화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부조화들은 비단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서도, 때론 가족에게서도 일어나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더 힘든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니 이해하려 하지 말자. 지구적 관점에서 보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함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때론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저 사랑하는 것이 옳은 일일지 모른다. 우리가 타인을 오롯이 이해한다고 하면 오만일 수 있으나, 오롯이 사랑한다고 하면 오만은 아닐 것이다. 어쩜 지금 이 시대는 “이해”보다 “사랑”이 더 필요한 때가 아닐런지.



젊었을 땐 내가 느끼는 불합리한 것들이랑 맞짱 뜨는 게 본능이라 그렇게 살아왔으나, 한해 한 해가 지날수록 결국 잘 사는 사람들은 불합리한 것들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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