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by cakes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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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게 뭐지?


가만 생각해보니 어제 3분 컵라면에 물을 부어 넣고 3분 만에 잠들어버렸다.



건망증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언갈 동시에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하나는 완전히 잊어버린다. 아마도 2가지를 동시에 못하게 태어났나 봐. 멀티 플레이어의 능력이 다분히 요구되는 시대에 가장 멀티적이지 않은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빨래를 개면서 TV 시청을 못한다. 둘 중에 하나만 해야 한다. 운전할 때 말 걸면 다른 길로 간다. 계속 말 걸다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다. 이런 나를 보고 누군가 껌을 씹으면서 길을 걸을 수 있냐고 물었었는데... 그건 되더라.



무언가에 집중했을 때 다른 것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몰입력 또는 건망증 때문에 그동안 정말 많은 것들과 굿바이를 했다. 아니 배드바이지. 그중 가장 많이 배드바이한 것이 지갑이어라. 지갑을 잃어버리면 난 항상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제일 먼저, 분실한 각종 카드를 재발급받아야 하는데 각종 카드를 재발급받으려면 은행에 가야 되고 은행에 가려면 신분증을 만들어야 하고 신분증을 만들려면 증명사진을 찍어야 하고 증명사진을 찍으려면 이발을 해야 하고 이발을 하려면 신용카드가 있어야 하고 카드를 발급하려면 은행에 가야 하고...




그래도 지갑만 잃어버리면 다행이다.



한 번은 폰과 지갑을 차 지붕 위에 올려놓고 달렸다. 주차장에서 차에 탈 때 맞은편에 있던 여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데 난 내가 멋있어서 쳐다보는지 알고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차 지붕에 지갑이랑 폰을 두고 차에 타면서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정신 나간 놈을 보는 것이었다.



폰과 지갑을 동시에 잃어버리니까 낭패도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나는 자연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래.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거다.'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자연인이 되었을 때 나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었더랬다.




나처럼 한심한 바보도 없을 거야.

오늘 힘들 날일 지라도 모두들 나를 보며 위로 삼길...

나는 오늘로써 두 번째, 지갑과 휴대폰을

차 지붕 위에 올려놓고 달렸다.

난 지금 내방 침대 위에서 접시물에 코 박고 있음.

아직 통화음은 가니까 좋아요도 누르지 말길,

숫자 1이 뜨면서 배터리가

더 빨리 닳을 것 같으니까...




친구들은 좋아요를 누르기 시작했고, 조금 후에 전화하니 친구들의 좋아요 응원 덕분인지 내 핸드폰은 꺼져있었고 그렇게 난 또 배드바이를 했다.



여자 친구가 사준 선물도 참 많이 잃어버렸는데, 당시에 여자 친구가 "이제 내가 사준 지갑만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 거네?"라고 했는데 난 그 지갑도 잃어버리고 ¹여자 친구도 잃어버릴 뻔했다.



그 이후 물건을 진짜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이제 내가 뭘 또 잃어버리면 난 사람도 아니다!!"라고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째 아이폰을 잃어버렸다. 멍멍.


그 날밤 다시 조용히 접시에 물을 받았다. '나는 뭐하는 인간일까..., 아니 나는 인간일까?' 그렇다고 마냥 의기소침하게 있을 수는 없으니 다음 날 새 아이폰을 개통하러 집 앞 대리점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괜히 좀 더 밝게 매장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 "안녕하세요!"

매장 직원 "오~ 부산 사람이죠? 나도 부산인데(반갑반갑)"

나 "아닌데요.(주민등록상 서울 사람)"

매장 직원 "어? 부산 아니에요? 경상도는 맞잖아요.(확신)"

......

나 "아 네... 폰 새로 개통하러 왔는데요."

매장 직원 "음 지금 보니까 폰 3개가 아직 할부로 물려있네요. 할부는 최대 3개까지는 가능해서 최소 1개는 일시불로 완납해야지 새 폰을 할부로 개통할 수 있어요."




난 그날 할부로 물려있었던 3개 중 1개를 완납하고 새로 아이폰을 개통했다. 세상에 이렇게 한심한 인간도 있으니 여러분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나를 떠올리시라.



내가 워낙 지갑을 잘 잃어버려서 그때 ²여자 친구는 오빠는 옷에 지갑을 붙일 수 있는 걸 만들어서 가지고 다녀야 된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이후에 나는 정말 옷에 연결되는 ³지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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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한테 고맙다. 덕분에 이제 지갑은 안 잃어버린다. 이 지갑 만들어서 완판하고 돈도 벌었다.

이제 지갑이든 뭐든 날 쉽게 떠나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다.

⁴여자 친구도.

평생 소장각.




주석

¹ 지금은 헤어졌다...

² 다른 분인데 또 헤어졌다...

³ 유주얼에딧 제품, 어태치 월렛

⁴ 아직 안 생겼다... 어디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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