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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맞바꾼 복부비만

곰돌이 푸는 행복합니다.

by 허용수

나는 비만이다.

작고 왜소한 체구에 임신한 여자처럼 배만 볼록한 전형적인 복부비만이다.

곰돌이 '푸'처럼 귀엽게 보일 수도 있는 체형이건만 우리 집 마님은 이런 나의 배를 어루만지며 혀를 찬다.


"이 배를 다 어이할꼬. 식스팩까지는 아니라도 복근이 좀 있어야 할 거 아이가.."

"남자가 쪼잔하게 식스팩이 뭐꼬. 그건 비쩍 말라야 나오는 거제. 남자는 마 원팩이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잖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이어트해서 살 좀 빼. 오래 살고 싶으면 제발"

" 오래 살아 뭐 할라꼬. 난 짧고 굵게 살 거거든. 그냥 내비둬."

" 당신은 이미 충분히 짧고 굵거든."

" 우 쒸... 솔직히 말해서 내 배의 8할은 당신이 만든 거잖아. 가스라이팅 하지 말라고."


사실 나는 억울하다.

아침은 채소와 과일 샐러드로 간단히 먹고, 점심은 요구르트에 견과류를 섞어 더 간단히 먹는다.

퇴근해서 집에서 먹는 저녁 식사가 유일하게 제대로 된 한 끼인데 그 마저도 항상 아쉬운 양만 담아 준다.

저녁을 먹고 나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등쌀에 함께 동네 산책을 나선다.

이 나이엔 걷기가 최고라며 무거동 일대를 넓게 돌아 기어이 만보계를 채워야 한다.

그런데 울산대학교 교정을 지나 무거동 행정복지센터 앞을 지날 때가 위기이다.

직선거리 대략 300미터 정도의 이 길은 맥줏집, 치킨집, 꼬지집, 족발집, 곱창집, 횟집 등 육해공의 각종 술집과 식당들이 화려한 불빛과 함께 온갖 향기로운 냄새로 유혹하는 거리이다.

저녁도 아쉽게 먹은 데다 만보나 걸어 다리도 아플 즈음 서로의 은근한 눈빛 교환만으로 합의를 본다.

시원한 치맥 한잔, 어떤 날엔 꼬지에 사케, 또는 조개구이에 소주, 다양한 술과 안주의 궁합이 환상적이다.


종일 도 닦듯 다이어트하고 운동한 고행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이 위험한 거리를 피해 마침내 태화강변 길로 코스를 바꾸어 보았다.

그런데 아! 이곳은 강을 건너지 말았어야 했다.

강 건너 태화동 강변은 알다시피 울산이 자랑하는 국가 정원 먹거리 단지가 아니던가.

다양한 식당과 술집 말고도 각종 화려한 카페가 즐비한 곳이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말라 일부러 술을 피해 들어간 전통 찻집에서 끝내 팥빙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고 시키지도 않은 가래떡과 조청을 왜 서비스로 내오는지 원망스러웠다.


마침내 특단의 조치로 위험한 저녁 산책을 포기하고 거실 TV로 유튜브를 보면서 홈트를 하기로 한다.

K-pop댄스를 음악과 함께 신나게 따라 추다 보면 재미도 있고 땀이 비 오듯 해서 운동량이 상당했다.

빠른 춤이 숨이 차면 하와이안 훌라댄스를 추기도 하는데 쉽고 부드러운 동작이지만 이 또한 충분히 운동이 된다.

아! 그러나 땀 흘린 뒤 시원하게 샤워하고 마시는 맥주의 청량함이라니...

맥주가 배를 만든다기에 어떤 날엔 하이볼을 만들어 마시기도 하고, 유산균이 좋다 해서 막걸리로 바꾸기도 하면서 결국 거실 장식장엔 주종만 다양하게 늘어나고 있다.

밖에서는 술 한잔도 다 못 비우는 우리 마님이 집에서 맘 편안히 남편과 함께 소소히 즐기는 이 시간이 소확행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우리 집 마님은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빵순이'다.

전국의 유명한 빵지 순례는 물론이고 어쩌다 빵이 똑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응급으로 시내 단골 빵집에라도 가야 한다.

그때는 집까지 오는 시간도 참지 못하고 차 안에서 빵을 뜯어 응급 수혈하듯 급하게 먹는데 운전하고 있는 나의 입에도 기어이 밀어 넣고야 만다.

거부했다간 싸늘히 눈을 흘기니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여행 중에 맛집을 가더라도 항상 자기 몫을 다 먹지 않고 남기거나 아예 처음부터 내게 덜어 놓는다.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겪은 우리 또래가 그러하듯 음식을 버리는 걸 죄악시하는 나는 음식 남기는 꼴을 못 본다.

나는 배 부른데 자기는 배 부르지 않으니 금방 식사를 하고서도 길거리 음식이 궁금하면 냉큼 사서 한 두 입 먹고는 또 나를 준다.


수년 전 마님이 유학 간 큰애 대학 졸업식 참석을 겸해 한 달 정도 미국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동안 국내에 남아있던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 5kg쯤 저절로 감량이 되었다.

다만 집에서 양주 한 병을 꺼내 TV를 보면서 외로이 홀짝홀짝 혼술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과음하여 오바이트까지 한 서러운 기억은 있다.




내 배의 나머지는 우리 어머니께서 완성하신다.

평소 자주 뵙지 못해 늘 죄송스럽고 명절이나 아버지 제사 혹은 생신 때라야 어머니 댁을 찾게 되는데 그때마다 내 배를 보시며 심각하신 표정으로 당신의 며느리에게 당부를 하신다.

애비 배가 장난 아니니 많이 먹이지 말라고.

남편 건강은 안사람이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시면서 제사 음식은 상다리가 휘도록 내시고 어쩌다 밥을 한 공기만 먹으면 반찬이 입맛에 맞지 않냐고 걱정을 하신다.

어머니는 왕년에 식당을 하셨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으시다.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어머니의 손맛을 기억하기에 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음식엔 늘 과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옛날 맛이 나지 않는다.

연로하신 데다 소소한 잔병으로 이런저런 약물을 장복하시니 미각이 둔해지셨는지 당신이 맛을 느끼시기엔 점점 짜고 달아진다.

음식만큼 마음도 짠해지지만 그럼에도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사랑과 정성을 맛있게 먹는다.

나의 복부비만은 나를 사랑하는 우리 집 여인들의 작품이다.

그들의 사랑과 소확행을 나의 배와 맞바꾸기에 오늘도 내 배는 행복으로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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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