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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이십여 년 전 어느 날 서울을 떠나 청주로 거처를 옮겼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 사이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이었다. 이 역시 앞서 그의 경우와 같이 옮겼다기보다는 쫓겨났다고 하는 쪽이 합당할 것이다. 즉 내가 아는 한 그는 도시에 이어 가족으로부터 쫓겨났으니 이미 두 번 쫓겨난 셈이다. 두 남녀는 물가며 집값이 비교적 부담이 적은 지방의 소도시에서 차근차근 빚을 청산해나갈 요량이었다. 그 이듬해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세상 물정 몰랐던 나는 옮겨온 거처를 서울 내의 한적한 동네 어딘가 쯤으로 생각했다. 다만 높은 건물이 드물고 이따금 푸르른 논밭이 시야에 들어오는 점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익숙해진 2호선 전철의 요란스러운 굉음이 들려오지 않아 전에 없던 고요함에 휩싸였다.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에도 딱히 이렇다 할 재주가 없던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전하기만 해서는 산더미 같은 빚을 청산할 수 없었다. 나는 가정이 공황을 맞닥뜨린 결정적 요인이 그의 잦은 사업 실패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사춘기를 보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98년 프랑스 월드컵 기념품이 장롱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까닭을 이해했다. 한일 월드컵 마스코트 이름도 알지 못했던 나는 ‘푸틱스'라는 이름의 시퍼런 수탉 캐릭터만큼은 익히 보아 알고 있었다. 시퍼런 몸뚱이의 수탉이 한 손에 축구공을 든 채 두 발로 득의양양하게 서있다. 이 같은 자세 그대로 라이터며 열쇠고리 따위의 온갖 잡동사니로 둔갑하여 장롱 한구석에 쌓여 있는 모습이 흡사 빚더미였다. 파리 시내 가정집에 있어야 할 온갖 푸틱스가 지구 반대편 좁은 집구석에 모조리 처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여담이지만 프랑스 월드컵 당시 한국의 아시아 예선 성적은 6승 1무 1패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둔 모양이다. 자연스레 온 국민이 대표팀의 선전을 기대했으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가 기념품 사업을 벌여 신분 상승의 희망을 품었던 것도 뜬 구름 잡는 소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세 좋게 프랑스로 떠난 대표팀은 멕시코와 네덜란드에 연이어 혼쭐이 나고 만다. 허무함에 한술 더 떠 이는 곧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차범근이 월드컵 도중 경질되는 유례없던 사태를 야기했다고 한다. 어수선해진 대표팀은 벨기에와의 마지막 혈투를 끝으로 1무 2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귀국했다. 그의 사업 역시 애국의 일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참패를 거두었다. 그렇게 수많은 푸틱스가 포장지 밖을 나서지 못한 채 장롱에 틀어박힌 모양이다. 나는 멕시코와 네덜란드를 향한 적개심으로 점철된 그의 표정을 상상했다.
지방에서 새로이 출발을 다짐한 그는 느지막이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이온음료로 명성을 쌓은 거대한 음료 회사의 납품운전직을 얻어내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쉰 살을 앞둔 나이에 느지막이 뛰어든 만큼, 새로운 출발이라는 모종의 기점에 동기를 둔 관성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노화를 맞아 시들기 시작한 그는 차츰 보다 젊고 활력을 띤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내주기에 이르렀다. 십수 년 남짓 그와 함께 전국을 누비던 8톤 트럭 역시 소중한 주인을 닮아 급속하게 노쇠해갔다. 배은망덕한 트럭은 이따금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멈추기도 하는 등 온갖 위험천만한 곤경을 주인에게 선사했다. 목숨을 부지함과 동시에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수리를 맡겨야 했다. 회사는 트럭의 결함이 해결되지 않는 한 그에게 일거리를 할당해주지 않았다. 하물며 막대한 수리비용은 자비로 충당해야 했다. 직원의 처지보다는 고객의 주문을 차질 없이 이행하는 데에 보다 고귀한 가치를 둔 이해관계가 작용한 모양이다. 말기 암환자의 처지와 같았던 그의 트럭은 매번 수리를 맡겨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울며 겨자 먹기로 의미 없는 수리를 마친 뒤 일거리를 받아낸다고 한들 도리어 적자가 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직면했다.
고심 끝에 그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익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애증이 담긴 트럭을 일찍이 폐차시킨 뒤 그는 다시금 생계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고등학생이었다. 그 후로 내게는 새벽 댓바람부터 집을 나서던 가장을 배웅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는 줄곧 예의 교차로 신문과 막걸리병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는 곧 그가 머지않은 근미래에 독거 중년으로 전락하리라는 징후였음을 미숙했던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렇다 할 재주가 없는 중년에게, 하물며 그 중년이 환갑을 앞두고 있다면 신문의 무수한 글자들은 모종의 의미 없는 낙서에 불과했다. 경쟁력을 상실한 가장의 절치부심이 빈 막걸리병에 고스란히 담겨 허술한 그의 주변을 호위했다. 눈가가 거무스름해져 밤늦게 집에 들어선 아내를 잔뜩 붉어진 낯으로 태평하게 잠든 그가 아닌 널브러진 막걸리병이 마중했다. 이같이 악몽과 같은 매일 밤의 광경은 그녀로 하여금 줄곧 깊은 한숨을 자아냈다. 간혹 어느 날은 그녀 답지 않게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이자 가장인 그의 막막한 심경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곤경을 실질적으로 타개하려는 데에 목적을 둔 이가 성실한 음주를 그 방편으로 삼는 모순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꾸준한 모순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떠밀렸다.
두 남녀의 이해관계는 잇따라 물리적인 충돌을 빚었다. 접시며 유리잔 깨지는 소리 표면에 중년 남녀의 메마른 고성이 날카롭게 스며 귀를 찌르는 밤이 부지기수였다. 돌연 둔중한 굉음에 놀라 방문을 열면 거대한 냉장고가 볼품없이 쓰러져 있기도 했다. 그들의 격렬한 육탄전 한가운데에 몸소 뛰어들어 둘을 갈라놓는 역할은 일곱 살 터울의 형 몫이었다.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소중한 수면시간 일부를 승산이 없는 무의미한 전투에 허비해야 했다. 줄곧 문을 닫고 태평하게 누워있던 나는 자주 느닷없는 고함에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움츠림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로 나는 자잘한 소음에도 필요 이상의 치를 떠는 부류로 성장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지독한 개인주의에 지배되었다. 혈연 간의 정겨움은 차치하고 온건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시 혼자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족속이 되었다.
그녀는 이미 그에게 경멸 외에는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같은 나날이 지속되어서는 네 식구 모두가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평생을 영위해야 할 노릇이었다. 돌연 그가 마음을 달리 먹고 투쟁적인 가장의 모습을 비춘다 한들, 수척해진 그녀의 마음은 무수히 깨져나간 접시와 같이 되돌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끝내 그녀는 그와 얽힌 관계를 모조리 벗어던지고 서로가 타인이었던 원시적 상태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