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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Dec 21. 2019

카세트테이프 B면 2


2


원체 나 자신이 괘씸한 성정을 타고난 족속인지, 혹은 눈 앞에 또렷한 호구지책이 보이지 않는 탓에 옹색함을 더해간 결과 괘씸해지기에 이른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그 책임을 생존방편의 일환으로 전가하여 다소 염치를 덜 수 있을 것이다. 거처를 옮기는 데에는 별의별 잡다한 지출이 발생한다. 며칠은 넋이 나간 채로 생활용품점과 대형 마트를 수시로 들락거려야 한다. 현재와 같은 속된 시대의 사람은 속된 물건들의 이점을 양껏 맛보았으므로 방대한 종류의 속된 물건을 탐한다. 모아둔 돈이 찢어진 쌀포대처럼 얄밉게 빠져나가는 꼴이 훤히 내다보인다. 나는 그 틈새에 천조각이나마 덧대 볼 요량으로 혈연인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괘씸한 성정이 기회를 엿보다가 고개를 내민 것이다. 몇 푼 절약하겠다는 역겨운 목적 외에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은 속내로 그간 홀대했던 이에게 피로 얽은 올가미를 던졌다. 그의 안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나는 파렴치하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공상이니 하며 떠들어댔던 앞서의 주접 따위는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었다. 예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는 상상이 뇌리를 꿰찬 것이다.


“아빠 잘 지내고 있지? 날씨가 추워졌네” 나는 우선 그의 안부를 물었다. 날씨 얘기를 덧대어 스스로의 몰염치를 조금이나마 완충해볼 속셈이었다. 자기중심적인 속내를 단번에 비추어서는 자식 된 도리로써 체면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혈연을 명목 삼아 서로가 붙들고 있던 피 묻은 밧줄은 그간 나의 홀대로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속내를 드러낸다면 이는 그야말로 패륜과 다름없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이 같은 자각을 할 정도의 양심이 손톱만큼은 남아 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 쪽에서 패륜이니 하며 홀로 양심과 씨름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정작 패륜이 맞는지 아닌지를 가늠해줄 그쪽에서 반응조차 없기 때문이다. 보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보통의 그는 늦어도 다음날이면 반드시 답장을 보내왔다. 그와의 교류가 철저히 두절되지는 않았다. 명절 또는 생일이면 안부 정도는 살필 최소한의 의무가 서로에게 존재했다. 그런 그가 어떤 반응도 없자 돌연 그의 생사여부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내 손을 떠난 올가미가 허공을 향한 건 아닐까. 옭아매야 할 대상이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 엄한 바닥에 곤두박질친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생사여부를 거론하며 이토록 부산을 떠는 꼴이 우스울 법하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수긍한 점이지만 나는 과대망상 증세가 다소 심하다. 끔찍한 사고 소식을 접한다거나 영화 속의 잔혹한 장면을 맞닥뜨리면 정신이 사뭇 불쾌해지는 기질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불쾌해진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망상에 잠긴다. 돌연 나를 필두로 가족과 지인을 희생자 역할에 대입시키는 괴상한 버릇이 작동한다. 이 같은 악버릇이 연출한 끔찍한 장면은 뇌리에 오랫동안 머무르곤 한다. 비로소 이는 실제에 근접한 상상으로 변모하여 나를 괴롭힌다. 그로 인해 나는 이따금 곤욕을 치러야 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 한 세계에서 잔혹하게 죽어나간 가족과 지인에게 자주 송구스럽곤 했다. 이들이 졸지에 맡게 된 희생자의 역할을 나 자신이 황급히 대체하는 것으로 사죄를 대신했다. 이처럼 과대망상증 말기에 접어든 내가 곧장 그의 생사여부에 의문을 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니다.


고독사가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만 나는 여지없이 빌어먹을 악버릇을 작동시켰다. 과연 재능이라면 재능이랄 수 있다. 시답잖은 재능을 타고난 나는 또다시 그를 희생자 역할에 대입시키고 말았다. 이 역시 송구스러운 망상에 그쳐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그가 고독사의 필수 조건을 명백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가족을 비롯한 타인과의 교류가 극히 드물뿐더러 대화 상대가 전무하다는 점. 또한 영양을 갖춘 끼니조차 챙겨 먹지 못하고 있을 그는 내 망상을 최초로 실천에 옮길 선구자에 근접하다. 일말의 현실성이라고는 띠지 않던 그간의 망상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괘씸한 아들놈의 이사 따위는 도와주지 않아도 좋다. 빌어먹을 푼돈을 절약하고 말고는 한없이 속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무엇보다 오직 그의 생사여부를 파악할 연락 한 통이 절실했다.


그는 세상에 딱히 내세울 만한 업적이며 재주도 없는 독거 중년이다. 업적과 재주가 없는 데다가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채 홀로 지내고 있는 그를 떠올리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수년 전 가족을 떠난 그는 고독한 공기에 휩싸여 노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실 쫓겨났다고 하는 쪽이 적합할지 모른다. 내가 아는 한 당시의 그에게는 딱히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의 남자와 같이 남편과 가장이라는 관습적인 지위를 얻어냈다. 다만 이 같은 관습적인 지위에도 막대한 책임이 따른다. 세상으로부터 모종의 역할을 부여받은 그는 이를 소홀히 해서는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했다. 전통과 관습의 측면에 한해서만 그를 평한다면 무례한 불순분자와 다름없을 것이다. 강경한 세상은 그의 보잘것없는 경제력과 잦은 음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따른 경제적 기근을 메우기 위해 그의 아내는 식당과 대형 병원을 밤낮으로 오갔다. 낮에는 환자의 침대보를 갈고 밤에는 손님의 밥그릇을 날랐다. 그녀에게는 어느새 하루 세 시간 남짓의 수면이 당연해졌으며 그마저도 소중했다. 철부지였던 나의 눈에 그녀는 태어나길 그 정도의 수면만으로 작동에 이상이 없는 억센 육체를 타고난 듯했다.


그러나 이는 육체가 아닌 정신과 자식의 장래를 염두에 둔 책임감의 영역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풍족한 경제력을 바라지 않았을뿐더러 음주에는 이미 두 손을 들었다. 가정의 공황을 타개하려는 최소한의 노력. 소매를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가장의 태도가 그녀의 유일한 염원이었다. 하지만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한 그에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경쟁력을 빼앗긴 그는 집 안에 틀어박혀 차츰 세상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세상 역시 낙오자는 그렇게 지내는 편이 가장 현명하다는 듯한 칭찬 섞인 눈초리를 그에게 보냈다. 총천연색 세상과 머리가 하얗게 센 그가 유일하게 섞이는 접점은 탁한 막걸리뿐이었다. 그는 안방 한가운데 쓸쓸하게 앉아 낮이고 밤이고 막걸리를 들이켰다. 동시에 곧장이라도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교차로 신문 구인구직 지면을 유심히 훑었다.


그러나 노쇠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에게 환대를 표해줄 글자는 눈을 씻고 보아도 쓰여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치명적인 결함이 삶에 소극적인 그로 하여금 정당성을 품게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아내는 그에 비해 고작 세 살이 적을 뿐이다. 일과를 마친 그녀가 현관에 들어서면 보통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눈가가 축 늘어져 돌아온 그녀는 이따금 약국 봉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찢어질 듯이 늘어난 비닐봉투 속에는 자주 먹물 염색약과 박카스 두어 상자가 담겨 있었다. 그녀 역시 하얗게 세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부자연스러운 흑빛으로 뒤덮었다. 냉장고 안에는 늘 수십 병의 박카스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좁은 틈새로 막걸리 서너 병이 주제넘게 자리했다. 어느덧 갱년기를 넘긴 그녀는 그와 막걸리에 전적으로 싫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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